나의 첫 상경은 내 뜻이 전혀 아니었다. 초등학교 친구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6년을 한결같이 붙어 다닌 친구가 있었다. 그는 나보다 말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으며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았고 무엇보다 리더십이 뛰어나서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도맡아 했고 선생님들도 그를 아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읍내의 중학교에 갔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친구는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공장생활을 하러 혼자 올라갔다. 설이나 추석에 그가 고향에 내려오면 같이 어울려 다니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를 나누었다. 서울의 작은 공장에서 숙식하며 기술을 배우는 그는 언젠가는 훌륭한 기술자가 되어 돈을 많이 벌고 집도 사서 고향에 혼자 사시는 어머니도 모셔다 서울에서 살겠다는 꿈을 얘기하곤 했다. 그가 들려주는 서울은 신기하기만 했다.
평소에 친구는 편지로 내게 서울살이를 전했다.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 적게는 한 달에 한번 늘 자잘한 서울생활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나도 가끔 학교생활과 고향의 친구들 얘기를 그에게 적어 보냈다.
고등학교 1학년의 겨울방학 때였다. 그즈음 그는 편지에서 자주 공장생활의 고달픔과 앞날에 대한 두려움 등을 적어 보냈다. 그때마다 나는 힘내서 참고 견디자는 말을 답장으로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받은 그의 편지는 나를 놀라게 했다. "친구야 아무리 견디고 견디어도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로 시작된 그의 편지는 온갖 비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끝은 홀로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걱정하는 말로 맺고 있었다.
나는 당장 그가 뭔 일을 저질러 버릴 것만 같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주소는 알고 있어도 전화번호를 모르기에 직접 연락해볼 수도 없었다. 부모님께 편지를 보여드리고 서울 가는 여비를 타서 다음날 서울로 향했다. 4시간 반 넘게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니 저녁이었다. 마음이 급했기에 부랴부랴 편지에 쓰인 동네를 찾아갔다. 그곳은 지금의 불광동이었다.
지도 검색 시스템이 없는 시대여서 복덕방, 지금의 부동산 중개소를 찾아 물어보고 동네를 샅샅이 뒤졌으나 골목을 돌고 돌아도 비슷한 번지만 계속 나올 뿐 밤늦게까지 친구가 일하는 공장을 찾을 수 없었다. 찾다 찾다 못 찾고 동사무소를 찾아가 야간 당직하는 공무원에게 물어봐도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날이 밝으면 찾기로 하고 근처의 여관을 찾았다.
좁은 골목에 작은 간판이 붙어 있었다. 종업원이 방으로 안내하고 숙박부를 들고 왔다. 이름과 주소, 출발지와 목적지도 숙박부에 적었다. 숙박부를 본 종업원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어린 학생이 뭐하러 서울까지 왔냐고 묻고 가더니 잠시 후 여관 주인인듯한 아주머니와 함께 방에 들어왔다. 아주머니는 다짜고짜 내게 서울에 온 이유를 따져 물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주인아주머니는 당연히 물을 권리가 있다는 듯 다그쳤다. 마치 가출한 불량학생을 잡도리하는 기세였다. 친구를 찾으러 왔다고 몇 번을 말해도 믿지 않았다. 친구가 보내온 편지봉투의 주소를 보여줘도 믿지 않아 결국에는 안에 든 편지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제야 아주머니는 방을 나갔고 한참이 지난 뒤 종업원이 찐 고구마 세 개를 놓고 갔다.
낯선 곳 서울에서의 밤, 몸은 피곤해도 잠은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얼핏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누가 문을 두드렸다. 경찰의 불심검문이었다. 경찰이 여관의 방을 돌며 투숙자를 불심검문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던 시절이었다. 경찰은 숙박부에 기재된 내용을 보며 내게 서울에 온 이유를 물었다.
어쩔 수 없이 또 친구의 편지를 꺼내 보여주니 경찰은 친구를 만나고 나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친구가 잘 있는가만 확인하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친구 만나고 나서 딴생각 말고 바로 집으로 내려가라고 말했다.
다음날 일찍 다시 공장을 찾아 나선 나는 허망하다 할 정도로 쉽게 공장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젯밤 돌고 돌았던 골목의 끄트머리에 보일 듯 말 듯 숨어있는 건물이 공장이었다. 공장 문앞에서 친구를 부르자 기름 묻은 작업복을 입은 녀석이 튀어나왔다.
"네가 웬일로 서울엘 다 올라왔냐?"
나는 와락 반갑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해서 그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찼다. 녀석은 자기가 보낸 편지를 잊고 있었다. 공장살이가 너무 힘들어서 편지에 하소연을 써서 내게 보내고 정작 녀석은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공장장에게 말을 하고 그와 공장 뒤편의 산비탈에 서서 아침햇살이 쏟아지는 동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찼다. 그제야 나는 그 동네가 산 밑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한산이었다. 찬바람을 맞으며 그의 공장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시골 고향에 내려왔을 때는 한 번도 하지 않던 이야기였다.
힘든 공장일에, 선배직공과 공장장의 주먹질과 멸시에 친구는 몸과 마음이 멍들어 있었다. 공장 사람들은 따로 머물 방이 없어 공장에서 먹고 자는 나이 어린 내 친구를 동료 직공이 아니라 그저 심부름하는 애송이 잡부로 취급하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명목으로 밥값으로 월급을 다 떼어가고 그저 명절 때 집에 내려가는 교통비와 몇 푼 안 되는 떡값을 쥐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똑똑하던 내 친구는 기술을 배워 독립하겠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4년 가까운 시간을 버텨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의 말에는 절망과 분노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의 절망은 위로할 수 있어도 분노를 잠재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를 그냥 그대로 두고 시골에 내려가면 절망과 분노가 그의 앞날을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고향에서 남의 농사지어도 이것보다 낫다. 공장을 다니더라도 고향 가까운 도시에서 어머니 모시며 다니자고 친구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서 보낸 4년의 세월이 물거품이 되고 고향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빈털터리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 공장은 아니다는 생각은 그와 내가 같았다.
공장으로 돌아와 그만두겠다고 친구가 공장장에게 말하자 공장장이 험악한 얼굴로 내 친구의 뺨을 후려쳤다. 공장장은 나를 향해서도 오른팔을 들었다. 친구가 옆에 놓여있던 몽키스패너를 집어 들고 소리쳤다. 내 친구 때리면 너 죽여버린다고. 누가 죽고 사는지 보자고. 나도 소리쳤다. 당장 내 친구 4년 치 월급 내놓으라고. 직공들이 쏟아져 나오고 친구와 나는 공장장 편에 선 그들과 마주 서서 대치하였다. 하지만 친구와 나는 모두가 한패인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다. 친구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짐을 싸야만 했다.
친구는 그나마 어깨 넘어 배운 기술이 아까워서라도 다른 공장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에서 어떻게 그를 도울 수 있을지 막막했다. 기껏 생각해낸 게 내가 어젯밤 묵은 여관이었다. 일단은 여관의 주인아주머니에게 사정을 말하고 방을 잡아 짐을 풀었다. 친구와 밤을 새워 고민했으나 앞으로 어떻게 살지 뾰족한 수가 없었다. 친구는 서울에 남기로 했지만 당장 머물 방 한 칸은커녕 밥값 한 푼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곯아떨어져 자고 있는 친구를 두고 그 전날 밤에 나를 검문했던 경찰 아저씨를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아는 사람이라곤 여관 주인아주머니와 검문한 경찰 아저씨가 전부였으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주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길을 찾아가니 파출소가 있었다. 안에 들어가 그 경찰 아저씨를 찾으니 지금 순찰 중이니까 기다리란다. 무작정 기다렸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기다려도 그 아저씨는 오지 않았다.
점심때가 다 되어 갈 때쯤 나이가 아버지뻘쯤 되는 경찰 아저씨가 들어왔다. 젊은 경찰들이 일어서서 나오셨냐고 말하는 것을 보니 그가 상관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아저씨가 바로 내 친구의 문제를 풀어줄 사람이라고 직감했다.
나는 그 경찰 아저씨를 물고 늘어졌다. 자초지종을 말하는 동안 나는 오직 친구가 서울에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친구가 당한 폭력과 4년 동안 받지 못한 월급에 대해 자세히 말했다. 내 얘기를 다 듣고 난 그 경찰 아저씨가 옆의 젊은 경찰에게 말했다.
"이 학생 말이 맞는지 지금 같이 그 공장 가서 알아보고 와."
경찰과 나는 공장에 들어섰다. 경찰은 나를 두고 공장장을 찾았다. 공장장이 나오자 경찰은 그를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내가 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의 얘기를 들으면서 공장장은 계속 나를 힐끔거렸다. 한참 후 이야기를 끝낸 경찰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지금 당장 네 친구 찾아서 파출소로 같이 와라."
나는 부랴부랴 여관으로 돌아와 방앞 마루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끓여준 라면을 먹고 있는 친구를 끌고 파출소로 갔다. 파출소에는 공장장이 와있었다. 경찰들의 눈총 아래서 공장장이 내민 것은 내 친구의 여섯 달치 월급이었다. 친구는 종이 한 장에 경찰이 불러준 대로 쓴 뒤 그 아래에 이름을 적고 손도장을 찍었다. 그 돈을 받는 대신 써줘야만 했다. 파출소를 나오며 친구와 나는 경찰 아저씨들에게 수없이 고개 숙여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 돈으로 우선 방을 얻기로 하고 복덕방을 찾았다. 복덕방 할아버지가 보여준 세 군데 중에서 작은 마당이 보이는 빈 방을 정해 사글세를 계약했다. 여관 주인아주머니가 말해준 대로 시장에 가서 쌀과 라면과 냄비 등을 사고 옆 방에 세 들어 사는 사람에게서 연탄 두장을 얻어 아궁이에 불을 피우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늦은 저녁을 라면으로 때운 뒤 다음날 아침 나는 며칠만 더 자고 가라는 친구를 서울에 남겨두고 집으로 내려왔다.
친구는 새로 들어간 공장에서 얼마간 일한 후 서울 근교의 여러 공장을 전전하며 내가 대학에 가고 군대생활을 하는 동안 꾸준히 편지를 보내오더니 어느 날부터 소식이 끊어지고 말았다. 나는 제대하고 취직해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하며 몇 번이나 친구를 찾으려 했으나 찾지 못했다. 지금까지 친구 소식을 알 수가 없다.
서울에 올라와 수십 년을 살면서도 그 옛날 나를 서울로 불러낸 친구는 만날 수 없는 것이 세상살이다. 오늘은 친구와 함께한 북한산 자락의 그 겨울 사흘처럼 날씨가 차다. 여전히 서울은 내 고향보다 춥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