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매치기가 노동운동가에게
선생님, 이 사과 하나 드셔 보십시오. 제가 바깥세상에 살 때는 사과는 시어서 좀처럼 입에 대지 않았는데 여기 와서 사람들이 사과를 찾는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일단 맛이 예전의 시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고 달콤한 그 무엇이 그냥 내 몸으로 스며드는 느낌이 드는 게 뭐랄까요 온몸을 단맛으로 쫙 적시는 기분이 든다니까요. 이런 맛이 제 몸을 적시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어요. 제 입맛이 변해서일까요? 아니면 제 몸이 이곳에서 견디려면 이것을 먹어야 한다고 내게 명령을 한 걸까요?
요즘은 제가 저의 행동을 스스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삽니다. 그것이 제 의지인지 자동 기계가 제 머릿속에서 저를 돌리고 있는 건지. 남들은 몸이 다 알아서 하는 거라지만 저는 제 몸이 제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제가 지금 횡설수설하고 있나요? 아 참 사과 얘기하다가 뜬금없이.
선생님, 예전부터 선생님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선생님 보고 사람들은 노동운동가라고 하대요. 노동운동이라는 게 평범한 사람이 갖는 일에 대한 생각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라면서요? 선생님은 크게 뭐 일 저지르거나 남을 쥐어 팬 것도 아니더만 단지 머리에 든 생각 다르다고 그리 쎄게 받았어요? 하기사 선생님이 거기 그 단체 대빵이어서 다 책임 몰아서 지고 들어온 거라고들 하지만 이건 너무 쎄요.
이 사회에 맞지 않는 노동에 대한 생각을 갖고 행동했다고 징역을 때려요? 저같이 남의 물건 훔쳐다가 팔아먹은 사람도 아니고 머릿속에 딴생각 품었다고 감옥에서 살아야 해요? 전 무식해서 모르지만 법이란 게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지난번에 이방에서 위세 떨던 사기 전과 5범 아저씨는 남 등쳐먹은 돈만 수억이 넘는다는데 기껏 3년 받았잖아요. 저는 그 아저씨가 선생님보다 몇 배 더 나쁜 사람 같은데요. 법이 원래 그래요?
선생님은 주위에 아는 사람 없어요? 선생님 면회 와서 나가시는걸 통 못 봤어요. 선생님은 여기 들어오고 나서 주윗사람들하고 그냥 의절하고 사세요? 아니면 선생님이 여기 들어오자 주윗사람들이 죄다 모른 체 하는 건가요? 소매치기 겸 날품팔이로 세월 보낸 저도 감방에 면회 오는 친구가 있는데 선생님 같은 분을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으니 그게 하도 이상해서 그래요. 선생님이 하시는 걸 봐서는 다른 사람 인심 잃을 정도로 행동하시지는 않았을 성싶은데요. 아. 지난번에 아드님 한번 다녀갔었지요? 아드님이 대학교 선생님이라면서요. 고등학교도 아니고 대학교 선생님이면 저 같은 사람하고는 완전히 딴생각하고 살겠네요. 아는 것도 엄청 많고.
저 내일 나갑니다. 그동안 선생님하고 이 방에서 두 달밖에 같이 지내지 못했지만 선생님 보면서 저도 많은 생각했습니다. 저와 딴 판으로 세상 사람들이 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선생님만치 딴판으로 사는 분은 첨 봤거든요. 그렇다고 제가 선생님한테 특별히 들은 말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 제가 선생님 때문에 달라지고 말고 할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저도 세상 살아봐서 압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잔잔히 가슴에 밀려오는 때가 있다는 것을요. 또 기회가 되면 노동에 대한 책도 구해서 읽어볼까 합니다.
아마도 제가 내일 밖에 나가서 옛적 살던 쪽방에 다시 들어가 누우면 아마 선생님 생각이 제일 먼저 날 것 같습니다. 그것이 뭔지는 확 손에 잡히지는 않아도 선생님이 그냥 저를 두 달간 말없이 지켜 바 주신 뜻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아요. 부디 몸조심하시고 건강하세요.
2. 노동운동가가 소매치기에게
이게 우리나라 전통 사과 홍로일세. 단맛이 강하지. 생각나네. 고향집 언덕에 사과나무집이 있었네. 알고 보면 내 인생이 이렇게 풀린 것도 이 홍로 사과 때문이라고 말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걸세. 이 사과를 서리하러 갔다가 만난 사람이 과수원집 딸이었고 그 누나를 따라 예배당을 다니면서 세상에 눈을 떴지. 마침 그 교회에 새로 온 전도사가 내게 전해준 막스 자본론을 읽은 게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자네와 이렇게 마주 앉는 운명으로 이끈 계기라네.
굳이 자네에게 이 사회의 운행 원리를 말해 무엇하겠는가? 다 부질없는 관념 놀이일 뿐이지. 한때는 목숨과도 바꿀 만큼 대단하다고 느끼고 지켜온 신념도 나이 먹어가며 세월에 다 깍아내려가고 이제 남은 건 이 빈 몸뿐이네. 그렇다고 내 인생이 전혀 의미 없는 허깨비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네. 그 시절에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번뇌하며 지킨 신념이니까.
그렇다 해도 돌이켜보면 나는 인생을 낭비한 죄를 범하고 말았네. 노동 이론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거든. 그건 바로 사상 이전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네. 물론 노동에 대한 생각도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지만 그것은 현실에서 구현되기까지는 수많은 난관을 거쳐야 해서 보통사람들은 중간에 다 나가떨어져버린다네. 그렇다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네. 다시 말해 노동조건의 성숙 이전에 내 가족과 이웃을 향한 원초적인 사랑. 그것만이 진정으로 이 사회를 따뜻하게 이끄는 것임을 나는 알지 못한 거네.
그때 나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생각 하나만 변화시키면 이 세상이 전부 바뀔 것이라고 생각했네. 차가운 이성으로 무장한 선각자만이 이 땅의 사람들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했네. 잘못된 생각이었던 거지. 사람은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니까 그 생각만 바꾸면 모든 행동이 바뀌고 그 행동의 결과로 사회도 자연스럽게 바뀌게 되는 거라고 착각했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땅의 선구자라고 생각했지. 내가 그 길을 가겠다고 생각한 거야.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네.
내 생각과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필요했네. 감옥에 들어오고 수년간을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위해 수많은 논리를 가로 세로로 엮어서 새로운 이론체계를 세우려고까지 했었네. 신성한 노동을 사상체계의 근본으로 삼은 막스의 이론을 길잡이 삼아 새로운 이상 사회 모델을 만들면 이 사회를 보다 나은 사회로 만들 수 있다고 확신했네. 노동자의 권리를 기반으로 이상 사회 건설을 꿈꾸었네.
하지만 어느 날 감옥에 들어온 시골 할아버지와 지낸 석 달이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고 말았네. 내가 완전히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지. 그 할아버지는 자식 일곱을 낳아 기르는 평범한 시골 농부였네. 그분이 감옥에 오게 된 것은 이웃집의 못된 자식을 훈계하다가 본의 아니게 그의 아버지와 시비가 붙게 되고 그 와중에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히게 되어서였네. 이전에도 그분은 남을 돕다가 수없이 자신의 많은 것을 잃었다네.
그분의 한평생은 이웃에 전답을 비롯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빼앗기고 또 빼앗긴 인생이었네. 굳이 따지자면 그건 모두 노동을 빌미삼은 족속들에게 당한 갈취였네. 그럼에도 그 분은 이웃을 원망하지 않았네. 그 분의 인생 순간순간의 절망과 고통을 들으며 나는 인간의 행복은 결코 노동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네. 나의 노동관 세계관이 완전히 바뀐 날이었네. 그날 나는 내가 지켜온 신념체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뜬눈으로 밤새워 울었다네.
어찌 보면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동생의 끼니를 위해 소매치기를 하다 이곳에 잡혀온 자네보다 내가 더 한심한 작자 인지도 모르겠네. 내 인생에는 이상과 사상은 있어도 인간에 대한 사랑은 없었네. 냉철한 이성에 대한 무조건적인 확신이 나를 노동운동기계로 만들었네. 사람을 위해 산다고 했지만 정작 내 마음속에는 사람은 없고 공허한 관념과 이념만 있었던 거네.
하나 있는 내 자식 놈의 생일 한번 챙겨주지 못하고 운동한답시고 밖으로 떠돌아다니고 서로 마주 앉아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눈 적이 없으니 엊그제 그 녀석이 면회 와서 마주 앉아도 할 얘기 한 자락이 없었다네. 이 얼마나 한심한 인생인가?
그 할아버지의 생애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순간순간 피 끊는 삶을 살아간 사람들이었네. 그 사람들과 부딪치고 껴안고 살아온 그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사회를 이루는 참된 길이었네.
자네의 새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내일 밖에 나가거든 날마다 자네와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보게. 나처럼 헛된 관념이나 이상에 휘둘리는 일에는 절대 나서지 말게. 나는 인생을 잘못 살았네. 후회하고 또 후회하네. 부디 밖에 나가거든 나는 잊어주게. 부끄러운 인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