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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조 Oct 22. 2024

오프라 윈프리를 향하여


사람이 보험이다.20

오프라 윈프리를 향하여


보험설계사를 시작했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보험설계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강의를 하고 싶었다. 어떤 내용을 어디서 강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강의를 꼭 하고 싶었다. 내 안에 무언가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있었고 나는 그걸 터트리고 싶었다. 그냥 그 당시의 나로서는 멈추는 것을 원치 않았지만 방법을 몰라 답답해하던 시기에 보험사에 입사했다.


나에게 보험설계사를 제안했던 당시 팀장은 보험설계사가 되면 학력 및 모든 조건과 무관하게 강의할 수 있다고 했다. 강의에 대한 나의 욕구는 팀장에게 아주 훌륭한 미끼였다. 그래서 나는 앞뒤 없이 설계사를 시작했다. CIS를 받았고 지점장 면접을 보고 나서 대학 졸업장이 없고 프리랜서로만 일해온 내가 탈락할까 불안했다. 지금이야 그게 절대 탈락할 리 없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때는 그런 무지렁이였다.


보험사에 입사하고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자리라는 걸 가져보았다. 너무 좋아서 한 시간을 타야 하는 만원 좌석버스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갖은 알바로 다져진 내 손에 가입설계서라는 서류를 들고 다니는 것이, 내가 컨설팅이라는 것을 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서 가슴이 설레었다. 하지만, 나는 보험설계사로서 강의를 하는 기회는 영업을 엄청나게 잘할 때 주어진다는 것을 몰랐었다.


나는 영업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보험약관과 금융정보를 알아가는 재미에 빠졌다. 공부한 내용을 정리해서 고객들을 위한 소식지를 직접 만들고 매월 발송하느라 시간과 경비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니 동료들은 신상품이 나오면 나에게 상품설명을 들으러 왔고 민원이 들어오면 대응 서류 작성을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사람은 만나지 않고 분석하기만 좋아하던 나의 영업실적은 당연히 안 좋았고 누적된 부채로 인해 강의는커녕 계속 일을 해나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손해사정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공부해 온 보험약관을 더 많이 공부하고 그걸 서류로 만들어 내는 직업. 나는 손해사정사를 그렇게 알고 이직했다. 나이 먹은 아줌마가 손해사정 보조인으로 들어가서 여자라서, 아줌마라서, 초보라서 겪은 설움은 흔히 아는 스토리라서 생략한다. 중요한 건 그 설움과 고된 생활 안에서도 이 일이 내가 평생 할 일이라는 확신이 단단해지기에 자격증에 도전했다. 내 나이 만 40세에 합격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보험설계사로서 보험업계에 입문해서 지금 손해사정법인을 운영해 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고 많은 이들의 생로병사를 목도하고 함께 경험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나의 현재는 과거와 분리되어 있지 않고 과거는 그 전의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며 그 과거는 현재의 내가 기억해 내고 느껴내는 것으로 재생산된다는 것이다.


취업이 지상 최대 과제라 여겼던 시절에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당시 인기였던 치기공과에 입학했다가 너무나 하기 싫어서 2학년에 중퇴했지만, 그 시절 억지로 했던 치아형태학 등의 의학에 노출된 경험이 보험약관에서 다뤄지는 의학이론에 대한 거리감을 없이 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IMF로 다시 관둬야 했던 국어국문학과에서 배운 언어와 작문은 보험약관을 해석하고 손해사정서를 논리적으로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고생스러웠던 설계사 시절이 있었기에 의뢰인들의 보험가입내역을 보고 그 이면까지 고민해 보는 손해사정사가 될 수 있었다.


초기에 입사했던 손해사정회사에서 온갖 설움의 아이콘으로 지내며 일을 익혀야 했지만 그곳이 친절하지 않았기에 반드시 자격증을 따서 내 회사를 차려야만 하는 이유가 되어주었다. 만약 회사 선배들이 친절했다면, 나를 아껴주었다면 나는 자격증을 따지 않았을 수도 있고 회사 대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느 굽이 굽이 이유가 없었던 순간은 없었다. 그저 고통이고 끔찍하기만 했던 그 당시의 ‘오늘’이 지금은 없어서는 안 될 ‘하루’로 회상되기도 한다. 현재의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지금을 위한 과정’이다. 과거에 기억했던 고통이 지금은 그렇게 변해 있다. 그리고 지금도 미래의 ‘지금을 위한 과정’이 될 거라 믿는다. 그런 나에게 누군가 걱정스레 말했다.


“힘든 과거를 말하지 마. 그럼, 사람들이 안 좋게 봐.”


나는 과거 ‘오늘’의 의미를 지금의 소중한 ‘하루’가 된 이야기를 자주 하고 싶다. 그 ‘오늘’을 힘겹게 쌓고, 쌓아서 어느새 층층히 쌓인 카스테라 위에 생크림을 예쁘게 덮어주고 빨간 체리로 장식해서 현재의 나에게 주고 싶다.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가 불행한 과거를 가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지만, 누구도 오프라의 가치를 그 과거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는 그 불행한 과거를 극복했기에 더욱 현재가 빛나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는 힘들었던 ‘오늘’을 토크쇼 출연자의 마음을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하루’로 변환해낸 것이다.


아직 내 안에 폭발시켜 내지 못한 에너지가 꿈틀거린다. 이것이 폭발해도 되는 과정의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난 ‘오늘’이라는 만들어 준 케이크를 맛보고 있다. 나의 ‘힘든 과거’를 걱정하는 이가 있는 것은 아직 나의 에너지가 변환의 과정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프라 윈프리가 도착한, 누가 봐도 명확한 ‘오늘’이 그 ‘하루’가 되는 그 지점을 향하여 지금 이 순간을 명료하게 인지해 본다.


나의 과거를, 미래의 과거인 지금을. 나는 계속 현재를 생산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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