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책은 언제나 중간에서부터 펼쳐진다."
쉼보르카의 '첫 눈에 반한 사랑'은 담담하지만 섬세한 어조로 첫 눈에 반해 운명이라 인지하는 순간까지 눈치채지 못한 채 스쳐지나간 크고 작은 순간들이 있었노라고 얘기한다. 낡은 계단에서, 어린 시절 기억 속 그 어딘가에서, 여행지의 수하물 보관소에서, 운명이 무르익어가기까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크고 작은 인연들이 있었노라고.
우연은 운명의 원인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우연의 연속이 삶 그 자체일 수 있다. 단지 그 우연의 풍요 속에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지속되는 우연 속에서 한가닥의 의미를 찾아 끊어질 듯 가느다란 줄에 실을 더하고 칠을 하고 매듭을 매어 더욱 두껍고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 뿐.
내 운명의 책은 이제 막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준비를 마친 듯 하다. 우연의 순간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얽히고 엮여 오늘에 닿았다. 우연히 손에 쥔 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던 세계일주 스크랩북, 갑자기 잠에서 깨어 달력 종이에 적어보던 나의 꿈, 졸업시험의 압박에서 벗어나려 들었던 국제인권법 강의, 컨선의 시리아 활동내용을 통역하며 느꼈던 설렘. 의미란 일이 발생하는 순간 부여되거나 생기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내가 그리는 나의 모습이 현실 속 미래와 맞닿이게 하기 위해 의미를 부여하고 덧칠을 해가며 잇고 또 이어왔다. 그리고 오늘, 나는 에티오피아의 아침을 맞았다.
원서접수부터 면접, 신체검사, 화상면접을 마쳤고, 4주간의 영월 국내교육을 수료했다. 수료증과 함께같은 꿈을 꾸는 15명의 동기를 얻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현지적응교육이 시작되었고, 이 곳에서 함께하는 7명의 동지가 있어 낯섦이 두려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가족과 친구들의 걱정과 응원은 이 곳에서 지낼 동안 내게 기도가 될 거라 믿는다. 두렵지 않다면 자만이고 두렵기만 하다면 나약함이다.
잘 해낼 거라는 위로와 격려를 스스로에게 보내며, 화이팅, 짜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