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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Aug 14. 2023

어게인 그들이 사는 세상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는 2008년에 폭망한 드라마다. 감독 잘 모르는 사람도 표민수 감독은 안다. 작가 잘 모르는 사람도 노희경 작가는 안다. 현빈, 송혜교는 간첩도 안다. 그런 이들이 모여 최고 시청률이 고작 7%였다. 그것도 1회였다. 배우빨이었다. 재방송도 티비로만 보던 시절이라 엥간하면 시청률 20%가 뚝딱이던 때였다. 드라마가 망한 이유는 “너무 현실적”이라는 거였다. 언제는 안 팍팍한 적이 있었겠냐마는, 살기가 힘들어 드라마에서까지 죽는 소리 보기 싫다는 거였다. 그래도 마니아는 있었다. 본방을 사수하고, 명대사를 외우고, 대본집을 사고, kbs 게시판에 시청 소감을 남기는. 나같은 애들 이었다.      


내가 ‘그사세’를 얼마나 좋아했냐면 일단 송혜교를 따라 머리를 잘랐다. 송혜교의 작중 이름은 주준영이다. 나는 주준영이 되고싶었다. 미용실에 가서 주준영 사진을 보여줬다. 염색하고 불륨매직 해야 하는데요. 최소 10만원은 들겠는데요?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내가 살면서 가장 미용실에 돈을 많이 쓴 날이었다. 미용실 언니의 솜씨가 기가 막혔다. 거울 속에 주준영이 앉아 있었다. ㅋㅋㅋ. 주준영이 찬 시계와 잠바도 갖고 싶었다. 초록색 판때기의 시계는 빈티지 롤렉스, 잠바는 몽클레어였다. 못 샀다. ㅋㅋㅋ. 무엇보다 따라하고 싶었던 건 주준영 몸매였다. 주준영과 내가 같은건 작은 키 뿐이었다. 그 해에 마음먹고 다이어트를 했다. 그리고 주준영이 찬 시계, 입은 잠바와 비슷한 아이템들을 사고 차서 소준영 행세를 했다. ㅋㅋㅋ. 누구나 살면서 천둥벌거숭이같이 나댈때가 있지 않은가. 나는 소준영 때가 그 때였다.     


연애도 ‘그사세’로 배웠다. 현빈이 맡은 정지오는 주준영에게 애인이었고, 인생의 멘토였고, 같은 길을 먼저 가는 선배였고, 우상이었고, 삶의 지표였다. 극 중 대사다. 나는 부단히도 정지오를 찾아다녔다. 똑똑하고 따뜻한 정 많은 남자친구를 찾아다녔다. 찾았는지는 모르겠다. ㅋㅋㅋ. 암튼 그런 정지오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기준을 세웠다. 그리고 또 주준영이 함께 일하는 배우, 작가, 후배 피디에게 사실은 정지오와 사귀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다. 거기서 또 하나 배웠다. 주준영은 말한다. “내가 자지도 않은 남자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해~!” 으른의 연애였다. 나는 애송이였네.     


사회생활도 ‘그사세’가 알려줬다. 몇 번이나 같은 장면을 반복 촬영하는 주준영에게 카메라 감독이 화를 낸다. 열불 터트리며 이야기한다. 나도 프로야. 프로가 일 힘들다고 화내는거 봤어? 카메라 들고 뛰는게 힘든게 아니라고. 선배님~ 죄송합니다. 다시 가겠습니다. 선배님~ 더운데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만 더요. 라고 말이라도 했다면 본인도 본인 이름 걸고 하는 일 기꺼이 한다고 한다. 아, 저게 프로구나. 회사는 저런 곳이구나. 언제든지 말은 중요하구나. 또 인상 깊었던 건 일 잘하는 놈은 싸가지가 없어도 건드리지 못한다는거. 그리고 인간성이 아무리 좋아도 일을 못하면 말짱 헛거라는거. 시청률 40% 제조기 손규호역의 엄기준과 그 시절 무능한 피디 단역으로 나온 남궁민이 알려줬다.      


그런 ‘그사세’가 넷플릭스에 올라왔다. 리스트에 있는 송혜교의 앳된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눌렀다. 나는 이미 이 16부작 드라마를 5번 정도 봤었다. 한 7~8년만의 정주행이었다. 자막이 있는 버전은 처음이라지. 유튜브 드라마 요약본은 2배속으로 보는 나인데, ‘그사세’는 한 장면, 한 장면이 귀했다. 달달 외우는 대사도 자막과 함께 보니 또 달랐다. 마지막엔 울었다. 사실 며칠동안 새벽에 숨죽여 불 끄고 봐서 눈이 아팠다. 어찌됐든 레전드였다. 이 여름이 지나면 다시 주준영 머리를 해볼까. 이제 정지오는 찾으러 다닐 수 없으니까.


갓혜교 울언니 언제나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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