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나는 원동력
회사에서 늘 나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늘 허허실실 하고 장난도 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나를 브랜딩 해왔다. 대부분의 여론이 나에게 호의적이었고 친절했다. 특히 대부분의 직원이 남성인 직장에서 몇 안 되는 여직원끼리는 어떤 연대감까지 느낄 정도였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원래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모난 부분 없는 둥글둥글한 분위기를. 이 회사를 다니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그 가면을 유지할 수 있었고 심지어 앞선 그 이사 밑에서 고생한다는 이유로 부서 간 협조까지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이사는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는 평가는 관심 없고 그저 사장님에게 내가 그만두는 사유를 자기 탓이 아니라고 가리기만 급급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 팀이 아닌 다른 팀에서는 일 잘하는 애 그만두게 해 놓고는 여론몰이만 (그것도 본인 보다 위의 사람에게만) 하고 있다는 분위기라 참 다행이다. 나는 이렇게 되기 전엔 회식도 좋아하고 사람도 좋아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그냥 편하게 대하고 장난치고 여기저기 껴서 술도 자주 마셨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이사가 나에게 준 압박감 때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정으로 일을 줘놓고 '그거 그냥 하면 되잖아'라는 식으로 나를 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변하기 시작하였다. 나에게 프로젝트를 줘놓고 검토는 하지 않고 그저 재촉만 하는 사람일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때는 이 일이 백업해 줄 할 사람이 없어서 내가 힘들고 지친다고 했을 때 그래도 그거 나오면 내가 열심히 해서 인증받은 거라고 인정받을 수 있다며 술이나 한잔 사주고 다독였다. 근데 나는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다.
나에게 약을 먹게 한 장본인이 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국 나의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나는 갈아져 넣어지고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때를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내가 너무 안쓰럽다. 어떻게든 시간 안에 일을 해보고자 전전긍긍하고 조마조마했던 나에게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거 못해서 다음 단계를 진행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나는 열심히 했지만 안 되는 일이었고 그렇게 열심히 해봐야 아무런 의미 없으니 마음 편히 일하라고...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모든 사활을 그 일에 걸고 있었고 회사 안에서는 그 이사가, 회사 밖에서는 거래처가 동시에 나를 쪼아대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처리해야 하는 서류는 산더미고 전화로 별 같지도 않은 걸 물어대는 부장까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정들었던 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슬프지만 회사와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 않다. 오히려 나에게는 좋은 시점인 것 같다. 적절한 고난(순탄지만은 않았음), 이겨낼 역경 그리고 성장할 계기까지 얻었다. 이것만 보면 영웅이 탄생해도 모자란 서사이지 않은가. 내 인생에 얼마만큼의 부피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이 회사생활에서 퇴사라는 방어막으로 한걸음 떨어져 보니 저 전쟁터가 그저 모든 것을 불태우지만은 않았단 것을 알았다. 이렇게 또 배운다. 배워도 배워도 또 배워야 할게 생기겠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값진 경험을 하다니. 이 또한 행운인 것 같다.
이제 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가면을 쓰고자 한다. 새 환경에서도 잘 적응했으면 한다. 여태 몸담았던 직장 중 가장 젊은이가 많은 직장이다. 이번 직장에서는 어떤 것을 배울 것인지 너무 기대된다.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직 안주하기엔 갈 길이 너무 멀다. 배워야 할 것도 알아야 할 것도 많은 이 세상에서 한 톨의 먼지로 살더라도 어디에 고여 앉아있는 먼지보다 바람 따라 흘러가는 먼지가 되고 싶다. 다시 나에게 이런 원동력이 생겼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이번 퇴사로 얻게 된 가장 큰 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