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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May 12. 2024

끌림

나의 퀘렌시아

산허리에 비구름이 하얗게 걸렸습니다.

하늘로 오르다 무슨 미련이 남은 걸까요.

잠시 쉬며 발 아래 사람의 마을을 굽어보며 그리운 상념 하나에 그만 발목이 잡혀버린 것일까요.


뒷 베란다 창으로 바라본 산이, 이런 모습으로 나의 눈앞에 떡하니 펼쳐지면, 나의 머릿속은 숲의 싱그러움으로 이미 가득해지고, 발걸음은 벌써 현관을 나서고 있습니다.


나의 집은 17층입니다.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해 뒷 베란다 창에서 우뚝 솟은 산을 사계절 내내 볼 수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제일로 큰 자랑거리입니다. 몇 번 집을 옮겨볼 요량을 했지만 '산허리에 걸터앉은 비구름' 마냥 '미련'이 남아서 아직까지 미적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면을 생각하면 일찍이 떠났어야 했건만. 새집의 깔끔함이 왜 좋지 않겠냐만. 구태여 '함께 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情)도 깊어져서', 또는 '오래되고 낡은 것의 고유한 아름다움이 좋아서', 또는 '30대 후반에서 40대를 거쳐 50대 초입까지 이 집과 함께한 세월이 까마득해질까 봐' 등등 핑계를 대며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 가까운 곳에 마음만 먹으면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숲이 있다는 것은 '포기할 수 없는 끌림'입니다.


기후 변화 때문인지 올봄은 비가 잦은 편입니다. 덕분에 나무의 성장이 눈에 띄고 숲이 무성하게 우거져 비 그친 뒤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촉촉하고 폭신한 숲길을 걸으며 물기 머금은 나무줄기와 가지, 잎들을 눈에 담고 새소리와 바람 소리를 귀에 담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나의 최애 시간'입니다. 텅 빈 상태로 몰입하는 시간이며 신에게 감사하는 시간이며 있는 그대로의 삶을 긍정하게 되는 시간입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시간은 있습니다. 모든 이름에서 벗어나 오롯이 나라는 존재 자체가 되는 시간. 그 시간 안에 잠시만이라도 머물고 나면 다시 모든 이름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 한 줄기 얻게 되는 '영혼의 휴식 같은 시간'. 독서든 여행이든 글쓰기든 방콕이든  뒹굴거림이든 나만의 퀘렌시아는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입니다.


집에서 십여분 남짓 걸으면 산 초입에 다다른다.


비바람에 떨어진 때죽나무 꽃은 땅 위에서 하얀 별꽃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소나무 거친 줄기에 기대어 덩굴식물들이 키를 키우고 있습니다. 분홍꽃 진 자리에 초록색 산복숭아 열매가 조롱조롱 귀엽게 매달렸습니다. 계곡물이 졸졸거리고 산을 찾은 사람들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자연이 그려내는 풍경은 한없이 순해지게 합니다.




나의 퀘렌시아는 숲이 이끄는대로 끌려갔는데 텅빈  고요 속에 더욱 충만해지고 단단해진 나를 찾게 되는 곳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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