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12살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 때, 보험을 깨서 파리, 런던으로 가족여행을 떠났다. 처음 하는 자유여행이었다. 구글지도가 없었던 때라 손에 지도를 들고 다니며, 걷고 또 걸으며, 도시 여행을 했다. 어리다면 어리다고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아들과 딸은 불평 한번 없이 잘 따라다녔고, 자신이 지나고 있는 나이대의 여행을 즐겼다.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찾은,커피맛이 좋은 카페이지고잉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통유리로 밖을 끌어들인 곳에 자리 잡고 공부하던 아들이 내가 앉은자리로 와서는 "엄마, 이리 와 보세요." 했다. 아들은 자신의 연습장을 내밀었다. 연습장에는 '사랑이고 바게트겠지, 파리' 샹송 가사가 단정하게 쓰여 있었다. 며칠 전 "엄마, 이 노래 알아요?" 하며 밤늦게 내 침대로 침범했던 그 노래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나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프랑스어로 노래를 불러 주었다. "가사가 참 좋죠! 음도 좋고요!"
아들의 흥얼거리는 노랫말과 함께 2014년 그해 여름, 파리가 파노라마가 되어 기억 속을 흐르고 있었다. 도무지 떠나고 싶지 않았던 노트르담 성당, 불 켜진 밤의 에펠탑, 개선문 위에서 바라본 파리 정경과 그날의 바람, 오르세 미술관 앞에 퍼질러 앉아 시간을 잊었던 바이올린 연주, 지친 다리를 쉬었던 세느 강변, 몽마르트르 언덕의 화가들과 그림들, 어디서나 자유롭게 울려 퍼졌던 음악들, 플라타너스 가득한 가로수와 그 그늘을 화실삼은 거리의 화가들(거리의 화가에게서 수채화 한 점을 샀다. 식탁 유리 밑에 끼어두었는데 십년의 시간이 지난 만큼 빛이 바랬다.)......
장소는 그저 장소만이 아니다. 많은 장소는 사람과 기억을 동반한다. 그곳만의 향기를 동반한다. 너와 내가 공유한 삶의 조각과 서정이 있다. 파리는 '그저 한 도시'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이고, 바게트일 테고, 나에게는 '항상 나의 일부'고 '어딜 가든 간직할' 너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