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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나무 Oct 29. 2024

생의 아름다운 조각

등 뒤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사롭다.

눈을 감고 주위 소리에 귀를 열어본다.

사람의 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나의 숨소리.

이 단순한 생의 조각이 이토록 만족스러울 수 없다.


감았던 눈을 떴다.

그레이톤 잔에 담긴 묵직한 커피의 쓴맛을 본다.

발갛게 익은 감을 옆에 놓았더니 예기치 않은 예쁜 조화를 본다.

우연 속에 발견하는 생의 아름다운 조각이다.


잠들기 전 뒹굴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일.

따뜻한 온수로 뽀득뽀득 씻는 일.

당근, 표고, 양파, 달걀프라이를 얹은 간단 소박한 비빔밥.

담벼락 너머 가을이 내려앉은 앞마당 뒷마당을 기웃거리며 걷는 골목길.

머리카락을 감겨주고 말려주는 미용사의 가볍고 경쾌하고 능란한 손놀림.

딱 한주만큼의 각질을 밀어낸 뒤의 깨끗한 가벼움.

갓 구운 빵 냄새.

알람 없이 푹 자고 일어난 후 느리게 먹는 아침.

반려 식물 분갈이.

그리고,

여름 내내 뚜껑을 닫아두었던 보이차를 꺼내 차주전자에 우려내는 일.

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붉은 갈색의 보이차가 더욱 친근해지고,

유난히 냉기에 취약한 손끝에 그 따뜻함이 전해지고 겨울도 능히 견딜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일.


모두, 열거하며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생의 조각들이다.



바닷가 마을을 지나며 감 하나 손에 넣어 카페에 가져왔다. 무심히 커피잔 옆에 놓으니 서로의 존재가 더욱 또렷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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