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주재 시절 근무했던 법인 건물 모습. 2002년 10월 찍은 모습으로 이미 꽤 오래된 사진이다. 그 시절에는 매일 이 건물로 출퇴근했는데 이 공간에서의 생활이 아름다웠던 것만은 결코 아니었지만, 푸른 나무와 녹색 잔디 한복판에 세워진 이 법인 건물만큼은 꽤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1층에는 창고, Canteen, 쇼룸 등이 있었고, 사무공간은 주로 2층에 있었는데, 2층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열 받으면 내려와, 사진 좌측 1층 건물 밖 한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너무도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뻑뻑 담배를 피우며 분노와 열을 식히던 기억이 난다.
이 건물 안에서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좌절도 겪고, 미래에 대한 꿈을 품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모두 다 지나간 아련한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1. 토론토 푸른 하늘 아래로....
본사에서 근무할 때 신입사원 시절부터 줄곧 중남미 지역을 담당했었다. 그런데, 해외 지역 연수는 중남미가 아닌 유럽 France로 갔었고, 또 첫 번째의해외 주재 근무는 중남미나 France도 아닌 단 한 번도 담당해 보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지역 Canada로 발령받아 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다시 베이징, 타이베이, 홍콩 등 이번에는 기존 담당 지역에서 보면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중화권(中華圈) 지역에서 주재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총 14년여간 이 지역 저 지역으로 흘러 다니며 직장 생활하게 될 내 팔자는 아마도 전혀 생소했던 Canada 법인으로의 발령에서부터 그 시작이 되었던 것 같다.
Canada에는 2000년 초 부임했는데, 치안도 너무도 좋지 않았고, 경제적으로는 한국과 비슷하거나 아니면 한국보다 훨씬 가난한 중남미 국가만 오랜 기간 담당하고 경험했었던 나로서는 선진국인 Canada에의 부임과 주재 생활에 나름 기대가 꽤 컸다.
한편, 내가 Canada로 발령받아 부임할 그 시절은 한국의 IMF 경제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기로, 자의 반 타의 반 한국을 떠나서 해외로 이민을 가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그런 시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민을 떠나는 그들이 선택한 국가로는 물론 미국이 많았다. 하지만, 미국과 동일한 영어권 북미 국가이면서 또 역시 선진국이었지만 미국보다는 이민 가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던 Canada로의 이민도 많아서, 그 시절 Toronto의 Pearson 공항에서는 새로운 조국에 대한 희망과 꿈을 품고 Canada로 오는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주재원으로 부임해서 임기가 끝나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나와, 평생 그곳에서 거주할 결심을 하고 이민 온 그들과는 Canada 도착 목적이 완전히 달랐지만, 어쨌든 한국인 모두가 어렵던 시기에 한국을 떠나 Canada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나는 그렇게이민오는 분들에게 묘한 연대감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회사의 캐나다 법인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엄밀히 말하면 토론토(Toronto)가 아닌 토론토에 인접한 미시소거(Mississauga)라는 지역에 있었다. 하지만 본사 직원이나 우리들 역시 좀 생소한 미시소거라는 지명보다는 보다 더 알려진 토론토라는 지명으로 통상 법인의 소재지를 언급하곤 했었다.
주재기간 중 거주할 아파트는 사무실에서 가까운 미시소거 지역에서 찾아보기로 했는데, 집을 구할 때까지는 당분간 한국인 이민자를 대상으로 토론토에서 숙박업을 하고 있는 한인 교민 가정에서 하숙을 하기로 했다.
그 하숙집은 한국의 이민 알선업체 같은 곳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한국인 이민자들이 오면 숙박이나 초기 정착 등을 지원해 주고 대신 수수료를 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경우 숙박 외의 Canada 체류 관련 모든 업무는 법인 인사과에서 대신 진행해 주었던 상황이라 그 하숙집과는 관련이 없어서 구체적으로 그들이 어떤 일을 대행하고 지원해주는지는 잘 모른다.
하숙집은 2층 집이었는데 내 방은 2층에 있었다. 지하에도 큰 방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애가 둘 있는 젊은 부부가 이민 와서 집을 구할 때까지 좀 오래 머무르고 있었다. 2층의 또 다른 방에는 일주일에 한두 번 한국에서 항공편이 도착하는 날 새로운 이민자 가족이 도착해서 1~2일 머물다 떠나고, 또다시 다른 가족들이 들어오곤 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오는 항공편이 밤늦은 시간에 Toronto에 도착하는 것이 있었는지, 자정이 넘어 잠들 때쯤에 새로운 이민자 가족이 도착해서 짐을 푸는 등 부산하게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그 소음으로 종종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일주일에 몇 가족씩 끊임없이 2층의 그 방을 거쳐 Toronto 각지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곤 했던 것인데, 그런 이민자 가족들과는 정말 아주 잠깐 스쳤던 인연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IMF의 어려움을 피해서 온 그 많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한국과는 많이 다르고 인종차별도 때론 노골적으로 자행되는 새로운 조국 Canada에서 문제없이 정착해서 잘 살 수 있을지 같은 한국인으로서 마음이 좀 쓰이기도 했었다.
국토는 넓지만 인구는 많지 않은 캐나다의 대자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숙집도 토론토 시내에 있었지만 역시 주변은 온통 녹색 잔디였고, 그 잔디 위로 오래된 거목들이 곳곳에 서 있는 그런 곳에 있었는데, 마치 숲 속에 세워진 주택 같은 곳에 거주하는 느낌이었다. 특히 인구 밀도가 낮은 데다가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무엇보다 공기가 너무 좋았다.
그런 멋진 곳에서 짙은 나무 냄새를 맡으면서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 어쨌든 서울 도심에서는결코 볼 수 없는 그런 동물들이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구경하며 한동안 출퇴근했었는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너무나 오랜 기간 회색빛 콘크리트 아파트 단지 속에서만 살아왔고, 또 그런 곳으로만 출퇴근을 반복했던 내게는 숲 속 같은 그런 곳에 거주하는 느낌은 정말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꽤 신선한 경험이었다.
식사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국이나 반찬을 미리 만들어 두면, 투숙객들이 먹고 싶을 때 부엌에 가서 알아서 꺼내서 먹는 그런 방식이었다. 부엌에는 투숙객들이 식사를 할 수 있는 나무로 된 큰 식탁도 하나 있었는데, 아마 주인집이 그 숙박업을 하기 위해 그 집으로 이사 오면서 새로 구입한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라면을 끓인 냄비를 무심결에 그 식탁 위에 그대로 올려놓은 일이 있었는데, 이후 라면을 다 먹고 냄비를 들어보니 냄비의 열로 그 새로 산 식탁 위에 조금 탄 자국이 생겨 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새로 구매한 식탁인데 상황은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아 주인 아주머님을 찾았지만 마침 하숙집 주인 가족이 아무도 없어서 얘기를 못했다. 나중에 만나면 얘기하려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부임 초기 경황이 없고, 또 밤늦게 귀가하고 아침에는 일찍 출근하는 등 이런저런 바쁜 일로 그 일을 깜빡 잊은 채 그저3~4일이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깜박했던 그 며칠 사이에 그 냄비 자국 문제로 적지 않은 소동이 생겼다. 지하 방에 살던 이민자 가족과 하숙집 주인 가족 간 이 건으로 다툼이 발생했던 것이다.
주인집에서는 당연히 하루 세끼를 모두 집에서 해 먹는 그 이민자 가족이 그런 자국을 만들어 놓았을 것이라 믿었고, 왜 아무런 말도 안 했느냐 변상하라 등등 요구했고, 이민자 가족은 자신들은 그런 적이 없는데 왜 의심하느냐고 강하게 항변하는 그런 상황이었다. 주인집 입장에서는 새로 마련한 식탁이라 더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뒤늦게 사태를 인지하고 서둘러서 그 자국은 내가 만들었던 것인데 그때 주인집 사람이 아무도 안 계셔 얘기를 못했고 이후 깜빡 잊고 있었다고 죄송하다고 모두에게 상황 설명을 했다.
내 해명으로 주인집의 오해가 풀리긴 했지만, 그 사이 상호 간 감정적인 말들이 오고 가게 되면서, 이 일은 결국 이후 두 가족을 상당기간 서먹서먹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로 인해서 멀쩡한 관계였던 두 가족이 미워하는 관계로 변해버리게 된 셈이니 내 잘못이 너무도 컸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렇게 강하게 변상하라고 요구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비록 꽤 늦었지만 진실을 실토한 내게는 아무런 변상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가는 격한 대화 속에서생겨난 감정적 표현 때문에 지하에 거주하는 가족들에게는 변상하라는 사실 마음에 없는 강한 요구까지도 하게 되었던 것 같은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사소한 오해로 시작된일이 나중에는 애당초 원인을 제공했던 그 일 자체는 완전하게 잊히고 그 이후 주고받은 감정적 말로 인한 상처 때문에 더 악화되거나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지하실에 사는 이민자 부부에게는 늦게 말했던 것이 고의가 아니었으며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했는데, 남편은 뭐 이제는 다 해결됐으니 괜찮다고 허허 웃고 넘어갔지만, 주인집과의 말다툼으로 이미 감정이 상할 만큼 상했던 부인은 어쨌든 결과적으로 그 다툼의 근본적 원인 제공자였던 내게 한동안 매우 데면데면하게 대했다.
그 집에는 한 4살쯤 되는 아주 잘 웃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민 오기 직전에 부모가 집에서 머리를 곱슬머리로 파마를 해주었다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파마를 했는지 곱슬머리가 된 정도가 너무 심해서 머리카락이 정말 흑인 머리카락처럼 완전히 꼬여져 있었다. 주말이면 가끔 지하실 그 집에 놀러 가, 남편과 함께 맥주도 한잔하곤 하면서 그 아이 머리 보고 폭탄머리라고 놀리며 모두 함께 웃곤 하기도 했었는데, 그 냄비 자국 사건으로 인해 이후에는 한동안 지하에 잘 놀러 가지도 못했고, 혹 어쩌다 놀러 가서도 부인 눈치를 열심히 봐야만 했었다.
오래지 않아 그 가족도 자기 집을 구해서 이사를 갔고, 몇 달 뒤 이사 간 그 새집에 집들이 겸 선물을 들고 찾아갔었는데, 아버지나 폭탄머리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던 반면, 부인은 여전히 내게 다소의 감정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민 초기 힘들고 정서적으로도 매우 민감하던 시절 억울한 누명을 쓴 것이 많이 아팠고, 또 그로 인해 오고 간 말들의 상처가 꽤나 깊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았는데 내 잘못이 정말 너무도 큰 것 같았다. 조금만 더 일찍 말했어도 그런 오해나 갈등은 애당초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당시 내 나이는 30대가 막 끝났을 때였고, 그 부부는 나보다 좀 어려 30대 중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자는 컴퓨터 관련 엔지니어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IT 분야의 일자리를 찾아 자녀 두 명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 온 분들이었다.
그들을 처음 만났던 그 시절이 벌써 19년 전 일이니 그들도 이제는 캐나다 이민생활이 꽤 경과한 셈이다. 참 좋고 선한 분들이었던 만큼 새로운 조국에서 잘 자리 잡아서 행복하게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이유도 없이, 도대체 왜 웃는지도 도무지 모르겠는데 그저 마냥 깔깔 웃기를 좋아하던 조그만 폭탄머리 여자애도 세월이 지나 이제 이미 20대 중후반의 숙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아이가 성장한 시간만큼 나는 늙었겠지만말이다....
회사 근처에 거주할 아파트가 정해져서 나도 약 한 달여간 머물던 그 하숙집을 떠나 새 집으로 이사 갔다. 이후 약 1년 여가 지나갈 즈음에 부임 초기 하숙 생활 시절 생각도 나고 해서 설날 인사차 하숙집 주인 부부를 찾아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은 기존에 살던 집에서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서 살고 있었는데, 이민자 대상 사업도 중단하고, 기존에 살던 집보다는 훨씬 작고 외진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으로 봐서 아마도 이민자 대상 사업이 잘 안되어이사를 한 것 같았다.
당시 하숙집 주인 남편은 별 다른 직업이 없이 지렁이 잡는 일을 했었는데 (어디에 쓰이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 이민자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이 이민 초기에는 지렁이 잡는 일을 했었다), 부인이 해오던 이민자 관련 사업이 잘 풀리지 않았으면, 기존의 그 큰 2층 집은 유지가 어려웠을 것이다. 대학생이었던 예쁜 딸도 한 명 있었는데, 이사 후에는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는지 새로 이사 간 집에는 없었다.
그 하숙집 주인 가족, 그리고 지하 방에 살던 폭탄머리 아이 가족과의 인연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이후에는 모두 연락이 끊어졌는데, 집을 구할 때까지 한두 달 돈을내고 들어가서 잠시 살았던 하숙집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땅 Canada로 부임받아 고독하고 외롭던 초기 정착 시절 그분들과 함께 나누었던 시간과 공간 덕에 참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