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ronto에서 만난 IMF의 기억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05)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5. Toronto에서 만난 IMF의 기억


'IMF'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약자로 미국 워싱턴에 본사가 있는 '국제통화기금'이란 기관 이름이다. 즉, 좋다 나쁘다 등의 개념이 가미된 단어가 아니라 그저 한 국제기관의 이름일 뿐인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IMF'란 단어가 아픈 기억들과 상처를 연상시켜 주는 부정적 단어로 사용되었던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약 3~4년간 한국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사태를 'IMF사태'라 부르기도 했었기 때문이었다.


즉 대규모 외환부족 사태가 발생해 경제 위기가 초래됐던 그 시절, IMF라는 이 기관에서 무려 200억 달러에 가까운 자금을 지원받은 적이 있는데, 원래는 'IMF로부터의 구제 금융을 받아야 했던 대규모 경제위기 사태'라는 말을 그저 'IMF 사태'라고 불렀던 것이었다.


IMF 사태 기간, 중소기업은 이루 말할 것도 없고, 당시에는 너무도 쟁쟁했던 대우, 기아자동차, 진로, 한보, 삼미 등등 허다한 대기업들까지도 다수가 도산하여 많은 직장인들이 졸지에 실직자 신세로 전락했다. 또 주가 및 부동산 가격도 폭락하는 등 한국 전체가 너무도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어야 했다.


(한국 IMF 사태 관련 동영상, 03:56)

https://www.youtube.com/watch?v=XmPiH3nE15c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던 당시의 한국을 떠나서 해외로 이민 가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선호하는 주요 이민 대상 국가 중 하나가 북미 선진국 캐나다였는데, 한국에서 캐나다로 이민 가는 사람이 한 번도 연간 4천 명을 넘지 못했다가 IMF 외환위기 사태가 막 터진 97년에 처음으로 4천 명을 넘어섰고, 99년에 7천 명, 2001년에는 9천 명을 넘겨 정점에 이르렀으며, 한국의 경제 위기가 이후 다소 완화돼 가면서 다시 예년 수준으로 감소했다 한다.


99년 한 해는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보다 캐나다로 이민 간 사람이 더 많았을 정도라고 하니, 그만큼 많은 한국인들이 새로운 조국으로 캐나다를 선택해서 이민을 갔었던 이다. 97년부터 01년까지 5년이라는 그다지 길지 않았던 기간에 무려 3~4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들이 캐나다로 입국해서 캐나다의 국민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당시 캐나다나 미국 같은 선진국으로 이민을 갈 수 있었던 들은 까다로운 이민 자격 조건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던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적인 여유와 조건을 갖춘 분들이었다. 그렇지 못한 대다수는 경제가 이미 다 망가진 한국에 그저 대책 없이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선진국과는 많이 다른 후진국을 향해 이민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선진국인 캐나다로 이민 간 사람들의 새로운 삶도 결코 녹록하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마도 한국에서는 평생 사무직으로 일했던 사람들이었겠지만, 캐나다에서는 언어적 한계 등의 사유로 사무직으로 회사에 취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대다수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영업으로 캐나다에서의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영업도 대규모 투자가 들어가는 사업은 하기 어려운 실정이니 비교적 작은 점포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러다 보니 당시 토론토의 편의점, 세탁소, 식당 같은 작은 규모의 자영업소 중에는 꽤 많은 업소가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식당 경우는 좀 특이해서 이민자분들이 한국 식당을 운영하지 않고, 실제로는 한국 음식을 같이 팔더라도 일본 상호명과 간판을 붙여 놓고 일본 음식 중심으로 판매하는 식당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음식은 당시 캐나다에서 아직 잘 알려지지가 않아 고객 확보가 쉽지 않으니, 보다 더 널리 알려져 있고 또 한국 사람 입장에서는 다른 나라 음식보다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좀 더 쉽게 만들 수 있는 일본음식을 대안으로 많은 이민자분들이 택했기 때문이었다.


일본 식당, 이태리 식당, 중국 식당 등이 당시 토론토 외국 음식 식당의 주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국인이 이태리 음식을 만들어 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 중국식당은 토론토에 중국인이 워낙에 많아서 한국인이 끼어들기도 어려웠겠지만, 의외로 중국음식 만드는 과정과 방법은 한국 음식과는 너무도 달라, 주방 조리기구는 물론 심지어 주방구조까지도 달라져야 제대로 중국음식을 만들 수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결국 캐나다인들은 잘 몰랐을 수 있었겠지만, 우리가 자주 가던 토론토나 미시소거 인근 외관상 일본 식당으로 보이던 식당 대부분은 그렇게 한국사람들이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캐나다인이나 일본인 입맛 기준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한국인 입맛에 익숙한 한국인 주방장이 만들어낸 음식이라 그런지, 우리 한국인 입맛에는 한국인들이 운영하던 일본 식당 음식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일본 식당 음식보다도 훨씬 더 입에 맞고 맛있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한국 위상이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그런 분위기도 바뀌어 가고 있는 것 같다. 당시 집 근처에 있던 너무도 자주 다니던 '도쿄스시'라는 식당도 일본 도시 이름과 음식명이 들어 있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식당 같지만 실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는데, 최근 구글 거리뷰를 통해 다시 찾아보니 '서울관'이라는 한국의 수도 지명이 들어간 이름으로 상호가 바뀌어 있었다.




한국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분하고 난 후 한국을 떠나서 모든 것이 생소한 이역만리 캐나다에서 새로운 인생을 다시 시작한다는 각오로 이민을 온 한국인 이민자분들은 캐나다 초기 정착에 성공하느냐 못하느냐 여부에 따라 자신과 가족 모두의 미래 인생이 좌우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만큼 초기 생활은 긴장과 절박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때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불행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회사 근처에 점심때 종종 식사하러 가곤 했던 도시락 같은 음식을 파는 일본 식당이 있었다. 일본식 음식을 제공하고 일본 이름의 간판이 붙어 있는 식당이었지만, 이곳도 역시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부부가 모두 식당에 나와 일했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딸도 이따금 식당에 나와 서빙을 돕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식사하면서 가끔 그들과 몇 마디 대화도 나눌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한국에서 이민 온 지 채 1년도 안된 가족이었고, 캐나다 땅에서의 첫 사업으로 그 식당을 개점한 것이었다. 그 식당은 손님이 항상 꽤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어느 정도는 장사가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부부나 딸 모두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다소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유복하게 자라고 살았던 것 같은 푸근한 인상을 가진 분들이었고 게다가 밝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있어서 그런지 표정은 항상 밝았다.


그런데 어느 날 점심 먹으러 가보니 한참 점심 장사를 해야 할 시간임에도 식당 문이 닫혀 있었다. 혹 무슨 사정이 있어 그날만 쉬는가 생각했는데 이후에도 며칠간 식당 문은 계속 닫혀 있었고, 나중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 식당 주인 부부 중 남편이 갑자기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지병이 있었는지 아니면 사고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민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업을 제대로 해 보기도 전에 가장이 사망했으니 부인과 딸 여자만 2명 남게 된 가족들이 얼마나 황당했을지.... 정신적 충격도 너무나도 컸겠지만, 의지할 사람도 많지 않은 객지에서 가장도 없이 장기적으로 경제적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고 버텨갈 수 있을지....


그 뒤로 그 식당이 다시 문 여는 것은 보지 못했고 그 가족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희망과 꿈을 가득 안고 먼 나라 캐나다에까지 이민 와, 새로 개점한 깔끔한 식당에서 부부 그리고 딸까지 온 가족이 정착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열심히 일하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고 너무 갑작스러운 가장의 사망으로 그들이 겪었을 충격을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쓰리다.


그 가정이 그 이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는지, 아니면 계속 캐나다에 남아서 잘 정착해서 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어디에 계시던 충격과 아픔이 말끔히 치유되고 정말 잘 살고 계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미시소거 법인 건물 바로 앞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편의점도 하나 있었다. 주인이 50대 중 후반으로 보였던 것으로 봐서 아마 막 은퇴하고 캐나다로 이민 온 것 같았다.


교대하는 사람도 없이 항상 그 주인 혼자서 가게를 지키곤 했었는데, 편의점을 운영하기에는 그 주변이 너무 한적한 곳이라서 그런지, 매번 갈 때마다 보면 그 넓은 매장 내에 손님이라고는 거의 항상 우리 밖에 없었다.


또 토론토 시내와는 달리 이 매장 근처에는 한국인도 거의 없는 곳이라, 가끔 나 같은 한국인 손님이 들어오면 손님도 별로 없어 적막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매장 주인은 너무도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는데, 캐나다에 있는 편의점에서 한국인 주인과 한국말로 대화하며 물건을 살 수 있었으니 우리 역시 매우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내가 캐나다를 떠난 지 1년 뒤쯤 법인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돼서, 이후에는 그 편의점 주인이 예전과 같이 매장에 찾아오는 법인의 한국인 주재원들과 캐나다 생활을 얘기하고, 정겨운 한국말로 객지 생활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편하게 주고받는 그러한 재미는 더 이상 누리지 못했을 것 같다.


물론 그렇게 손님이 드물었던 그 편의점이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 운영되었을지도 사실 불분명하다. 손님이 너무 없어서 부득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면, 그 사장님뿐만 아니라 함께 이민 온 그의 가족 모두 아마도 이민 오면서 가져온 전 재산을 투입했을 캐나다에서의 첫 번째 사업 실패로 인한 좌절과 어려움을 너무도 크게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IMF 당시 캐나다로 이민 온 한국 이민자 직원들이 법인에도 몇 분 계셨다. 4~5명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대부분 4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그런데 사실 캐나다에 이제 막 도착한 당시 그분들의 영어 실력은 나와 별 차이가 없어서 솔직히 캐나다 회사에 사무직으로 채용될 수 있는 그러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 엄연히 캐나다 회사 중 하나인 우리 법인에 취직되어 사무직으로 근무하면서 이민 생활 초기부터 매월 꼬박꼬박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을 수 있었으니, 이민 오자 마자 영어조차도 제대로 안 되는 처지에서 알지도 못하는 캐나다 사람들을 매일 상대해 가며 장사를 해야 했던 식당, 편의점, 세탁소 같은 자영업을 하는 이민자분들과 비교하면 그분들은 축복받은 경우였던 것 같다.




이젠 IMF 경제위기도 한참 지나갔고, 캐나다로 이민 가는 한국인도 IMF 시절 대비 많이 줄었다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매년 4천 명이 넘게 캐나다로 이민 간다고 하는데 (2014년 4.5천 명, 2015년 4.1천 명) 매년 4천 명이면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한국을 떠난 그분들이 새로 선택한 조국 캐나다를 사랑하고 또 그만큼 새로운 조국 캐나다로부터도 인정받아 아픔 없이 당당하고 훌륭한 캐나다인으로 자리 잡고 결국에는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찾아 떠났던 이민의 꿈을 모두 다 이루었기를 기원한다.


오래전 그분들과 비슷한 IMF 사태 시기에, 그분들과 함께 캐나다에 도착했고, 또 잠시나마 그분들의 삶을 옆에서나마 보고 느꼈던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그렇게 응원하고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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