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자, 사라진 자, 남은 자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2편 Toronto-06)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Toronto



6. 떠난 자, 사라진 자, 남은 자


'IMF 사태'라고 불리던 한국의 경제 위기로, 캐나다로 이민 오는 한국인의 수가 절정에 달했던 2001년 여름 고등학교 시절부터 잘 알던 후배 가족이 캐나다에 온 적이 있었다.


그들 역시 이민을 결심하고 한국을 떠난 것이었는데, 다만 이민 가는 목적지는 캐나다가 아니라 미국이었고 미국 가는 길에 인접국인 캐나다에 들러 며칠 지내면서 여행을 한 후 마지막에 미국으로 넘어가는 그런 일정이었다.


그 후배는 나보다 2살 어린 내 동생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하지만 워낙 동생과는 친한 사이였고, 또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오다 보니 나와도 서로의 집안 사정까지 훤하게 아는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고, 그런 배경에서 캐나다에 여행 와 며칠간 신세를 지겠다고 부탁해 왔던 것이었다.


당시 이 후배는 이미 결혼을 해서 딸과 아들 2명의 자녀도 있었는데, 캐나다에 여행 올 때 큰 딸은 9살, 작은 아들은 5살이었다.


한편 이 후배가 미국으로의 이민을 최종 결심하고 캐나다에 도착한 2001년은 그의 나이 이미 40을 바로 코 앞에 두고 있는 때였는데, 그 적지 않은 나이에 어린 자녀 포함 4명의 가족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 남은 인생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한국을 떠나 왔으니 나름대로는 적지 않은 갈등과 고민의 과정을 거쳐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장으로서 큰 책임감을 갖고 이민이란 결정을 내린 그 후배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태어나고 자란 땅, 친척, 친구가 모두 남아 있는 고향을 떠나 너무도 생소한 외국에서 평생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한 가족의 가장이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또 해야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토론토의 한 여름인 2001년 8월 후배 가족은 미리 연락해 왔던 일정 그대로 토론토로 왔고, 나는 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후배와 가족에게 캐나다 구경도 시켜줄 겸, 그들과 함께 토론토 이곳저곳 내 차를 운전해서 돌아다녔다. 일본 공원인 Kariya Park이라는 곳에도 갔었고 또 이 공원 인근 한국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 후배와 함께 방문한 Kariya Park이라는 공원은 일본풍 공원으로 Mississauga시가 일본의 Kariya라는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게 되면서 Kariya시에서 만들어서 기증했던 공원이다. 전형적인 일본식의 정원을 그대로 캐나다에 옮겨 놓은 모습으로 그 동양적인 공원의 독특한 멋으로 그 당시 캐나다인들에게는 나름 꽤 유명한 장소였다.


사실 내가 보기에도 그 공원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서울의 비원과 같은 더 아름다운 한국식 정원도 있는데, 왜 일본식 정원만 그곳에 존재해 현지 캐나다인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지 나름 질투를 느끼기도 했다.


사진) 후배 부인과 두 자녀. 집 근처 일본식 공원 Kariya Park에서 찍은 사진.


(Kariya Park 내부 모습)

https://www.calculatedtraveller.com/blog/kariya-park-a-little-bit-of-japan-in-the-suburbs-of-toronto/


이 공원을 방문한 후 공원 앞에 있는 '도쿄스시'라는 한국인 운영 일본 식당에서 저녁도 함께 했다. 캐나다를 방문하는 본사 출장자들에게는 거의 대부분 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접대하곤 했던 만큼 이 식당은 주재 기간 너무도 자주 갔던 곳이었다.


하도 자주 가던 식당이라 그런지, 지금도 그 식당의 대부분 메뉴는 기억이 선명하다, '스시 A', '스시 B'가 우리가 주로 주문하던 메뉴였고, 동료 주재원이 너무도 즐겨 주문했던 '우설 구이'라는 메뉴도 있었다. 하지만 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 동료가 '우설(牛舌) 구이', 즉, 소 혓바닥 구이 요리를 시킬 때마다 소의 혀를 먹는다는 생각이 징그럽게 느껴져 번번이 섬찟함을 느끼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구글 지도를 검색해 보니 그 식당은 반갑게도 18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었다. 다만 과거와 달리 식당 이름은 '도쿄스시'가 아닌 한국 도시 이름인 '서울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리가 갈 때마다 반갑게 맞아 주시던 50대 초중반쯤 되어 보이셨던 식당 사장님도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이미 나이 70 가까이 되셨을 것인데,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면 타국에서 20년 가까이 같은 자리에서 식당을 하고 있으니 참 대단한 분이신 것 같다.




그 후배 가족과는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그런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당시 어디에 갔었는지를 기억해보려 해도 함께 갔던 식당과 공원 등 장소를 제외하고는 어디에 갔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후배에게 부탁해 당시 같이 돌아다녔던 현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까지 받아서 봤는데도 그곳이 어딘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를 배경으로 같이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 장소 또한 어딘지 전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후배 가족을 태우고 내가 직접 운전해서 갔던 곳의 사진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어딘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니 흘러가는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 같았다.


사진) 후배와 후배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이 후배고 후배 아들은 내가 목마 태우고 있다. 그런데 사진을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이곳이 어딘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비록 방문했던 장소에 대한 기억은 이제 희미해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그들이 왔을 때 너무나도 화창했던 토론토의 하늘과 뜨거운 여름 태양, 그리고 이민을 떠나온 후배 가족의 미래에 대한 기대와 설렘이 가득했던 모습만은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선명하다.




이럭저럭 후배 가족은 캐나다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고, 최종 목적지인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캐나다 땅을 거쳐 미국으로 향했던 후배 가족은 그로부터 몇 년 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이민 관련 수속을 대행해주던 곳으로부터 좋지 않은 일을 겪었고, 각종 수수료 등 큰 비용을 지불했음에도 결국 이민 절차가 완료되지 못해 한국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한국으로 되돌아온 그들은 당연히 초기에는 좌절이 많았을 것이다. 어렵게 고민해서 결정했던 이민건이 실패했던 것도 그렇지만, 누군가로부터 속았다는 사실에도 더 상처가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들은 한국에서 나름 자리 잡고 너무나도 잘 살고 있다. 큰 딸은 대학 졸업 후 취직했으며, 작은 아들은 군대 제대 후 4학년으로 복학해서 학교에 다니고 있고 예쁜 여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것도 길가다 우연히 본 적이 있다.


생각해보면 결과적으로는 비록 후배 가족이 원하던 대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에서의 현재 그들의 삶이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고 살았을 경우의 삶보다 결코 덜 행복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디에 사는지 보다 누구와 어떻게 사는지가 정말 중요할 것이고, 좀 더 깊게 생각하면 조물주가 이끌어 주는 인생의 길을 피조물인 인간이 다 판단할 수도 없을 것이다. 토기는 토기장이가 만드는 대로 만들어질 뿐이다.


그 후배 집은 과천에 있는데, 요즘도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과천에서 만나 당구도 치고, 술 한잔 곁들인 저녁까지 같이 한다. 과거와 같은 만남의 반복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 후배가 과거 캐나다에 왔을 때는 그래도 아직은 나이 30대 후반이었는데, 세월이 훌쩍 지나 이제는 흰머리가 가득한 나이가 됐고 나 역시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것일 것이다.


내 머리나 그 후배 머리가 흰머리가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도 못했던 학창 시절에 우리가 처음 만났는데, 이제는 둘 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만나고 있으니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할 뿐이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오랜 친구와 가끔 만나 술 한잔 할 수 있으니 그것도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런데 정작 그 후배를 알게 된 계기를 제공했던 내 동생은 이제 더 이상 함께 술 한잔 할 수 없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던 동생은 학교 일로 받는 스트레스가 너무 크다고 하소연하곤 했다 한다. 그리고 그런 하소연을 거듭하던 중, 내가 홍콩에 주재하던 2009년 어느 늦가을 일요일 점심에 라면 한 그릇 먹고 바로 낮잠 자는 듯하더니 그대로 그렇게 정신을 잃었고, 1주일쯤 뒤 40대의 아직은 한참 더 살아야 할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점심 식사 후 뇌혈관이 터져 정신을 잃은 상태였는데, 누워 있는 동생을 주변에서는 단순히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만 알았고 상황이 파악되었을 때에는 뇌 안에서의 출혈이 이미 너무 많이 진행되어 더 이상 손을 쓰기 어려웠던 상태였다 한다.


치열한 경쟁, 과도한 스트레스 그리고 건강관리 차질 등등 몇 가지 사유로 그러한 운명을 맞이했던 것 같은데, 운명을 달리했던 그 날짜가 공교롭게도 11월 11일, 즉 '1'이라는 숫자만 4번 들어 있는 날이라 쉽게 잊히지도 않는 날이다.


하지만 어쨌든 한 순간에 아무런 고통을 느낄 시간도 없이 그렇게 짧지만 한 세상을 살다 떠났으니, 어찌 보면 그나마 그것도 축복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질병과 아픔 속에서 수년 아니 수십 년 끊임없는 고통에 시달리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 정말 얼마나 많은가....


동생의 유골이 안치된 곳은 아버님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파주의 동화경모공원이다. 아버님은 그곳의 묘소에 계시고, 동생은 납골당에 있다.


한국에 완전히 귀국한 이후에는 가끔 아버님 묘소와 동생의 납골당을 방문했다. 그런데 갈 때마다 충격받았던 일은 그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는 영정의 사진들을 보면 짧은 인생을 살다 간 내 동생보다 훨씬 더 짧은 인생을 산 사람들의 영정 사진도 너무나도 많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10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의 영정 사진도 허다하다....


그 어린아이들의 사진을 볼 때마다 누가 언제 어떻게 다른 세상으로 불려 가는지는 정말로 그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짙게 들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10년도 채 못 살고 떠나야 하는 아이들이 태어난 이유는 도대체 뭘지....




캐나다에 왔던 그 후배 이외에도, 내 동생의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 한 명 더 있었다. 역시 내가 잘 아는 후배로 내 동생 상을 치르던 2009년에도 조문을 왔었고, 내 기억 속에도 너무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끼던 후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 좋은 일에 몇 번 연루되었다는 그런 소문이 있더니 이후에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고 주변 친구 모두로부터도 연락이 끊겼다 한다.


아래 사진에 교복을 입고 있는 세명이 그들인데, 중앙이 내 동생이고 우측이 캐나다에 왔던 후배, 좌측이 연락이 통 안 되는 후배다. 고등학교 시절 사진이니 오래전 사진인데 모두가 한참 어렸던 그 당시에모두 천수를 누리고, 오랜 시간을 친구로 남아 평생을 함께 할 것처럼 미지의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0여 년 뒤 한 사람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다른 한 사람은 생사도 알 수 없이 사라졌고, 나머지 한 명은 이민까지 갔다 다시 돌아오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래도 현재 나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학창 시절 사진 속 저 세 사람의 운명이 '떠난 사람', '사라진 사람' 그리고 유일하게 '남은 사람'으로 완전하게 갈라지게 된 셈인데, 신이 정한 이런 갈라짐의 기준과 의미를 정말로 잘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그 기준과 의미를 모른 채, 2001년 한여름 토론토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햇살을 어렴풋이 떠올리고 그리워하다 언젠가는 이미 떠난 그들처럼 남은 사람들 역시 조용히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사진) 동생(중앙)과 동창들의 고교 시절 사진. 그로부터 약 40여 년 뒤 이제는 '떠난 자', '사라진 자' 그리고 여전히 '남아 있는 자'로 그들의 운명은 갈라졌다.



사진) '떠난 자'의 생전 미소가 가득한 납골당의 영정 사진. 이젠 이렇게만 이 땅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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