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법인 부임 초기 나를 골탕 먹이기를 그렇게 밥 먹듯 하던 그 대단하기만 했던 영업책임자가 얼굴이 사색이 돼서 기겁을 하고 내 방으로 찾아와 애걸복걸하는 놀라운 경우도 있었다.
내가 부임하기 전에는 영업책임자가 마케팅 업무까지 같이 관장하고 있었는데, 내가 부임한 이후 마케팅 업무는 나의 소관으로 이관되었고, 그는 영업만 관장하는 체제로 업무가 바뀌었다. 그런데 마케팅 업무라는 것이 회사의 판촉활동과 관련되는 기본적으로 돈을 쓰는 일이었기 때문에 혹 발생할 수 있는 잠재적인 부정을 예방하기 위해서 마케팅 에이전시 선정 시에는 반드시 공개적인 경쟁입찰을 통해 정기적으로 진행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케팅 업무를 맡고 나서 보니, 지난 수년간단 한 번의 경쟁입찰도 없이 줄곧 한 업체만 마케팅 에이전시로 사용해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규정에 위배되는 일이라 향후에는 매년 공개경쟁입찰을 통해 업체를 선정하겠다고사내외에 공지했는데, 바로 그 소식을 듣고 영업책임자가 다급하게 나를 찾아왔던 것이었다.
그는 "그 업체가 잘해 왔는데 왜 바꾸려 하느냐?", "그 업체 계속 쓰자" 등등 간청하듯이 내게 요청을 했다. 언제나 여유 있고자신만만했던 그가 어찌 보면 별 일도 아닌 것 같은 그 일에 왜 그렇게 돌변해서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지 꽤 의아했는데, 어쨌든 규정에 어긋날 뿐 아니라, 그 업체가 실제 그렇게 능력이 있다면 공개 입찰에서 다시 선정될 수도 있으니 규정대로 집행하겠다고 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복수업체를 대상으로 새로 입찰을 진행했는데, 법인 내 관련 인력 여러 명이 평가한 점수 합계 결과 기존 업체는 탈락하고 새로운 업체가 선정되었다.
한편 입찰과정에서 기존에 장기간 거래했던 그 업체 사장도 처음 만나 볼 수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역시 영업책임자와 같은 이태리계의 캐나다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회사 소개와 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와 같은 이태리인들과 함께 일하면 좋은 일이 많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는데 좋은 일이 뭘 의미하는지 또 회사일에 왜 인종이나 국적을 거론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뭔가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대꾸하지는 않았다.
언제나 여유만만했던 그 영업책임자가 왜 그토록 절박하고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업체 변경을 막으려고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지금도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추정되는 것은 있지만, 이런 일은 추정만으로 언급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사진) 캐나다 법인 근무 시절 내 방에서 찍은 사진. 하도 속 끓이며 고생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사진 속의 내 표정에는 불만과 독기가 가득 차 보이는 것 같다.(2000년경 사진)
한 때는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영업책임자의 문제점들이 부각되고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입지가 점차적으로 약화되어 현지인 마케팅 과장이 그 영업책임자를 폭행죄로 경찰에 신고하는 일까지 생겼다.
단둘이 회의실 안에서 업무 협의를 하던 중, 업무 변경으로 소속이 변경된 마케팅 과장이 이제는 더 이상 자신의 직속 상사가 아닌 영업책임자의 요청 사항을 거부하자 그가 순간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 신고를 했던 것이었다. 실제 그 말이사실인지는 그 회의실에 그들 단 둘 밖에 없었으니 둘만이 진실을 알겠지만, 어쨌든 그러한일로 경찰에 신고가 됐고, 경찰이 대낮에 법인 사무실로 찾아오기까지 했었다.
선진국 캐나다의 회사 안에서 그처럼 황당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존재했던 일이다. 캐나다라고 사건사고가 없겠는가?
폭행죄 신고건 등 이러저러한 일들로 이후 그 영업책임자는 해고되었는데, 한동안 법인 내에서 무소불위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던 그가 마침내 해고되던 그날 혹 법인에서 행패라도 부리고 나갈까 걱정돼서 몇몇 사람은 미리 자리를 피하기도 했었다. 참고로 그는 키가 매우 큰 편은 아니었지만 레슬링 선수처럼 체격이 매우 다부지고 좋아웬만한 사람들은 그를 힘으로 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그런 체격이었다.
나 역시, 내가 그의 말을 단순히 수용하고 따르기만 했다면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그도 결국 해고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그 영업책임자가 나를 가장 미워할 것 같아 실은 겁이 나서 어딘가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를 개선하겠다고 굳세게 버텨온한국인 주재원으로서의 자긍심과 오기가 있는데 그런 나약한 모습 보이면 결코 안 될 것 같다는 자존심에 그냥 사무실에 남아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가 떠나면서 나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고 그저 조용히 짐을 싸서 나갔다.
그에 대한 해고 통보는 현지인 인사과장이 했다. 인사과장 역시 영업책임자처럼 이태리계 캐나다인이었는데 동일한 이태리계였지만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인사과장은 규정과 원칙에 놀랄 만큼 충실했고 매사에 준비도 철저했다. 마치 법인에서의 법과 규정 최후 수호자 같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영업책임자를 해고할 수 있었던 배경, 그가 그렇게 조용히 회사를 떠난 것 역시 그 인사과장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잘 준비하고 처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법인을 떠났던 영업책임자는 그 이후 Canada에서 근무하는 기간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다. 아마 우리 회사에서 있었던 문제점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 업계에 소문이 나면서 다른 회사에도 취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반면, 법과 규정의 수호자 같았던 그 인사과장은 이후 회사 북미 전체 인사 책임자로 승진하여 미국에 있는 북미본사로 영전되어 갔다.
두 사람 모두 같은 이태리계 캐나다인이지만 이처럼 평소의 행동이나그 행동의 결실 역시 이처럼 너무도 많은 차이가 있었던 셈인데, 이러한 사례가 결국 개인이 속한 소속이나 집단보다는 개인의 심성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매우 좋은 실례라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