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8일의 나로 인한
파일들을 정리하다 일기를 발견했다.
2019년 5월 8일의 글. 첫 번째 퇴사 후 다시 대학에 가겠다며 공부했던 시기였다.
불안감을 안고 그 해 8월의 시험을 준비했으며,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 모난 감성이 듬뿍 담긴 글들을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재꼈던 시기. 감정 쓰레기통을 빙자한 자아 성찰이었고, 자아 성찰을 모방한 한탄글이었으며, 한탄을 핑계로 공부를 소홀히하던 현실 도피의 산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파일을 클릭하기 전...... 한참을 머뭇거렸다.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아직도 안 지우고 있었단 말이야?'
오전 1시 14분의 감성으로 버무려냈던 글을 햇볕 좋은 오후 2시 23분에 펼쳐보는 건 정서적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제 와서 과거의 일기를 읽는 게 오글거린다는 감정 외에 지금의 나에게 어떤 감성을 줄 수 있을까? 그러자 여느 때와 같은 유혹이 머릿속에 넘실거렸다.
추억팔이 하게? 이 때 감성으로 다시 공부라도 시작할 생각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읽지 마.
달콤하게 퍼지는 유혹은 언제나 옳은 말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종종 호기심이 유혹을 이길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상황을 겪어내야 성장한다고 믿는 편이기에, 짐짓 무심하게 ‘20190508’ 파일을 더블 클릭했다.
나는 마음에 드는 글귀를 필사하는 것을 좋아한다.
혹은 나를 날카롭게 찌르는 구절 등을 필사하곤 한다.
자신을 위한 질책의 용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를 망설이던 글귀가 있다.
지금껏 이렇게 지내온 나를 향한, 그리고 앞으로의 나를 향한 저주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그 저주에 걸릴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부끄러운 일이다.
유혹은 언제나 옳은 말뿐이다.
이건 다시 열어서는 안 될 나만의 판도라의 상자였다.
그 일기는 과거의 내가, 언젠간 일기를 펼쳐볼 미래의 나에게 걸었던 저주였다.
에세이, 시, 소설, 노래 가사 등 어떤 장르여도 상관없이 마음에 와닿는 문장이 생기면 메모장에 꾹꾹 눌러 담는 행위가 좋았다. 지금의 나를 오롯이 설명할 수 있다는 만족감이 느껴져서 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글귀를 수집하며 허전한 마음을 감성으로 충전하던 낭만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필사를 망설였던 글.
너는 말이다, 한번쯤 그 긴 혀를 뽑힐 날이 있을 것이다.
언제나 번지르르하게 늘어놓고 그 실천은 엉망이다.
오늘도 너는 열여섯 시간분의 계획을 세워놓고 겨우 열시간 분을 채우는데 그쳤다.
쓰잘 것 없는 호승심에 충동된 여섯 시간을 낭비하였다.
이제 너를 위해 주문을 건다.
남은 날 중에서 단 하루라도 그 계획량을 채우지 않거든 너는 이 시험에서 떨어져라.
하늘이 있다면 그 하늘이 도와 반드시 떨어져라.
그리하여 주정뱅이 떠돌이로 낯선 길바닥에 죽든
아무것도 모르고 날 위해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해서 차라리 젊은 날에 독약을 마시든 하라.
-이문열, <젊은 날의 초상>中
예언이었다.
그 당시의 나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나는 반드시 시험에 떨어질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폭언 아닌 폭언을 했으니 당연히 내가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라는, 일종의 자기 방어기제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는 미래의 나에게 어느정도는 감당할 만큼의 저주를 건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7년이 지난 나는 과연 내가 건 저주를 풀어갈 수 있을까?
결국 나는 스스로를 향한 저주를 걸 수 밖에 없다.
그 어느 누구도 풀어주지 못하는 저주가 될 것이다.
맞서야 할 순간을 끊임없이 회피한다면.
그렇기에 매 순간을 간절히 기도한다.
나의 저주가 늘 유효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