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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 읽는 여자 Sep 01. 2023

30광년 전 나와의 조우

알쓸D잡

어떤 이론이건 물리법칙은 과거와 미래를 차별하지 않는다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지금 여기'의 특별함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엔드 오브 타임]이라는 일반인을 위한 과학책을 썼다.


뉴턴의 고전역학과 맥스웰의 전자기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그리고 수십 명의 물리학자들이 개발한 양자물리학은 한 가지 확고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어떤 이론이건, 물리 법칙은 과거와 차별하지 않는다." 라는 공통점이 바로 그것이다. 물리계의 현재 상태가 주어졌을 때, 계의 과거와 미래는 똑같은 방정식에 의해 결정되며,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고 수학적으로 문제 될 것은 전혀 없다.

-48~49쪽 [엔드 오브 타임]


나의 다이어리들에도 확고한 공통점이 한 가지 있는데, "어떤 해의 다이어리이건, 다이어리는 과거와 차별하지 않는다." 다이어리는 고등학교 1학년의 나와, 대학교 1학년의 나를 차별하지 않는다. 물론 서른 살이 된 나도, 마흔한 살이 된 나도 차별하지 않는다. 다이어리의 현재 상태가 주어졌을 때 과거와 미래는 똑같은 루틴에 의해 결정되며, 시간이 과거로 흐른다고 나라는 사람에게 문제가 될 것은 전혀 없다.


브라이언 그린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특정 방향으로 진행되는 시간에만 익숙하고 반대로 진행되는 사건은 볼 수 없을까?


물리학자 브라이언 그린은 그 해답을 엔트로피에서 찾는다.

나는, 나를 문맥상 다이어리학자라고 하자. 다이어리학자인 나는 그 해답을 다이어리에서 찾는다.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5년은 내가 다이어리에 첫 입문한 해이다. 그때의 다이어리를 지금도 가지고 있으면 좋겠지만, 나는 엔트로피를 가만두고 보지 않는 정리학자(역시나 문맥상 엄마를 정리학자라고 하자)를 엄마로 두고 있다. 정리학자인 엄마는 뭔가가 쌓여서 무질서의 세계가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엄마의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특징을 전연 이어받지 않았다. 나는 쌓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쌓아서 엄마가 비우게 된 건지, 엄마가 비워서 내가 쌓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하여, 첫 다이어리는 없다. 그런데 나는 첫 다이어리를 꽤나 잘 기억하고 있다. 그건 나의 첫 다이어리는 정리학자 엄마가 흔적도 없이 정리했지만, 내가 365일간 적은 그 흔적을, 기억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기억하는 것과, 다이어리에 써서 기억하는 것은 질과 양적으로 다르다. 그건 마치, 별을 보는 것처럼 현존하진 않지만 30광년 전의 나의 별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지금 분명 없지만, 30광년 전엔 있었고, 나의 과거에, 나의 기억에 분명히 존재한다.



1995년 고등학교 1학년 생물 시간, 타고난 문과였던 나는 생물 시간이 너무 싫었고, 모기처럼 웽웽 거리는 생물 선생님의 목소리도 당최 듣기 싫었다. 그랬었는데, 생물 시간에 일대 사건(내게는 빅뱅과도 같은)이 일어났다. 생물 선생님이 어느 날, 생물 교과서가 아니라 '시'를 읽어줬다. 나는 그날 이후로 생물 선생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타고난 문과 따위 잊고, 생물 시간을 기다렸고, 모기 같던 생물 선생님의 목소리마저 다정하게 듣기에 이르렀다.


그날 나는, 다이어리에 생물 윤덕원, 류시화 시인 '안개 속에 숨다' 라고 적었다.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인기척과 함께 곧 들키고 말지만
안개 속에서는
가까이 있으나 그 가까움은 안개에 가려지고
멀리 있어도 그 거리는 안개에 채워진다
산다는 것은 그러한 것
때로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때로는 멀어져 감을 두려 한다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나무 뒤에선 누구나 고독하고, 그 고독을 들킬까 굳이 염려하지만
안개 속에서는
삶에서 혼자인 것도 여럿인 것도 없다
그러나 안개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는 것
시간이 가면
안개는 걷히고 우리는 나무들처럼
적당한 간격으로 서서
서로를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결국 그러한 것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면서
안개 뒤에 나타났다가 다시 안갯속에 숨는 것
나무 뒤에 숨는 것과 안개 속에 숨는 것은 다르다

-류시화, <안개 속에 숨다> 전문



1995년 다이어리에 적었던 류시화 시인의 시를 브런치에 옮겨 적으며 17살의 나와 조우한다. 30여 년이 지났지만, 현재는 나는 1995년이 아닌 미래에 와 있지만, 나는 17살의 나를 만난다.


브라이언 그린 말이 맞다. 다이어리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를 차별하지 않는다. 시간이 과거로 흘러간다고, 문제 될 것은 없다. 나는 여기에 있고, 다이어리의 나는 거기에 있고. 나는 다이어리에서 30광년 전 나와 조우한다.  


© grakozy,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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