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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Mar 02. 2021

과외가 잘렸다

과외가 잘렸다. 자매가 동시에 그만두는 바람에 손실도 두 배다. 그날 밤 꿈속에서 뭔가가 나를 덮쳐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잠이 깼고 시간을 보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다시 잠들기도 틀린 것 같아서 책상 앞에 앉아 생활비 계산을 했다.      


가계부를 쓰기 시작한 건 일 년 전부터다. 지출할 때마다 휴대폰 메모장에 적는데 그전에 나는 한 번도 가계부를 쓴 적이 없었다. 1월에 사용 내용을 더해보니 885,030원(자동이체되는 공과금과 보험료, 통신비 제외)이었다. 생각보다 적어서 놀랐다. 이번 달에 젓갈을 부모님한테 보내느라 180,000원을 썼고, 큰 맘먹고 고구마 한 박스(60,000원)와 사과 한 박스(80,000원)를 샀다. 고구마는 싼 것을 샀더니 금방 썩는 데다 맛이 없어서 차라리 좋은 걸 사서 보관을 잘 하자 싶었고, 사과도 한 봉지에 만 원 하는 것을 사다 보니 감질나서 한 박스를 사버렸다. 사과와 고구마가 넉넉하면 초밥이 간식이 궁하지 않다.      


아무튼 젓갈, 사과, 고구마를 사지 않았다면 885,030-180,000-60,000-80,000= 565,030이었다. 식비를 600,000원 이하로 할 수도 있다니. 2월 식비는 600,000원을 목표로 해볼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식비를 줄인다고 해서 먹는 게 결코 부실하지는 않다. 실제로 정확히 1년 전인 12월은 지출이 2,165,814원이었는데 외식에다 옷도 샀고 테이크아웃 커피를 많이 사 먹었다. 하루에 스타벅스 커피를 두 잔을 마신 날도 있었다. 학원을 폐업한 지 7개월째 되는 달이었고, 수입이라고는 달랑 한 명 과외하는 게 다였을 때인데 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니? 가계부에 있는 일 년 전 나를 보고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찼다.


그때는 썼지만 지금은 쓰지 않는 돈이 보였다. 청암산이나 월명을 갔다가 오는 길에 밥을 사 먹고 스타벅스를 들렀다. 대형 마트에 가서 예사로 100,000 만원 넘게 장을 봤다. 수입이 없어진 건 생각하지 않고 기존 씀씀이를 줄이지 못했다. 지금은 집 앞 마트에서 야채나 우유 같은 걸 사고 당장 필요한 게 아니면 떨어졌다고 해서 바로 사지 않는다. 콘플레이크나 치즈, 국수 같은 것을 한꺼번에 사서 쟁여 놓지 않고 먹고 싶을 때 집 앞에서 소량으로 포장된 것을 산다.      


전에는 운동하고 돌아오는 길에 밥을 뭘 사 먹을까, 커피는 뭘 마실까, 하는 고민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초반에 돈 때문에 참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는 우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으로 뭘 사봤자 마음만 불편하다는 걸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운동하고 커피나 식당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예전 습관이 다른 습관으로 바뀌고 나니 상실감은 사라졌다. 곧바로 집으로 오거나 집 앞에서 간단히 장을 보면서 생활이 단순해졌고 오히려 마음은 여유로웠다. 결국 습관의 문제였다.     


오늘 마트에서는 파래가 나왔네? 무를 넣어서 새콤하게 무쳐봐야겠다, 하면서 파래(1,000원)와 무(1,500원)를 샀다. 그렇게 장을 보면 건강한 제철음식을 먹을 수 있다. 마음이 편한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있으면 좋겠다 싶은 어묵, 만두도 살까 하다가 필요하면 내일 또 사면되지, 하면서 내려놨다.     


이런 규모 있는 소비를 오랫동안 해온 사람에게는 우습겠지만 내가 이 정도까지 된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작년에 비해 지출이 삼분의 일이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신기한 건 특별히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 생각해보면 옷이나 화장품을 많이 사던 시절에 오히려 항상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여유 있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 정도의 소비에 익숙해져 버린 탓이었다.    

 

절약을 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쇼핑 사이트를 검색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않아도 되고 기름기와 MSG가 많은 배달음식을 먹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생활이 많이 단조로워졌다. 뭘 사기 위해 들러야 하는 곳도 줄었고 결제하는 일도, 집에 갖고 오는 물건도 줄었다. 한 달에 한 번 가던 미용실 주기를 두 달로 늘렸고, 네일숍을 가지 않은지도 일 년이 되었다.      


늘어난 것도 있다. 매일 감사노트와 소설 필사를 하고 있고 근육운동 4가지와 플래너 쓰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자기 분석 100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마에다 유지의 책 <메모의 마법>의 뒤에 1,000개 질문이 있는 부분을 복사해서 매일 10개씩 하고 있다. 평생 나로 살면서 나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나를 안다는 건 점점 나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식을 멈추고 밖을 향해 밖을 향해 날아가는 날개를 다는 일이 아닐까.     


예전에 나는 어디에 얼마를 쓰는지도 모르고, 일하니까 이 정도는 사도 돼, 하면서 소비를 했다. 멈춰있는 동안 그만큼의 소비가 나한테 필요하지 않고 그게 없어도 나는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굉장한 능력을 갖게 된 기분이었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느라 일을 쉬지 못했고 멈추지 못했던 시간이 떠올랐고 어쩌면 돈을 적게 쓴다는 건 자유를 사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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