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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18. 2023

우리가 대나무숲이었던 시간

나: 다 먹은 거야?

초밥: 어.

나: 아침에 밥 하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감기 걸려서 아픈데도 차렸는데 왜 안 먹는데? 그럼 나는 밥을 왜 한 건데?

초밥: 미안. 밥이 안 넘어가서 그래.

나: 안 먹을 거면 밥을 덜어야지. 아깝게 버려야 하잖아. 나 감기 걸린 것도 네가 남긴 거 먹고  걸린 거잖아. 내일부터 밥 없어!     


식구들이 남긴 밥을 먹어서 살쪘다는 엄마 얘기를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백번 이해가 된다. 요리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냥 된장찌개일 뿐이지만, 요리를 한 사람에게는 된장찌개 안에 들어간 두부, 애호박, 파, 양파, 감자 하나하나가 직접 사서 들고 온 것들이다. 요리 시간은 물론이고, 재료를 고르고 운반한 수고가 들어있다. 파는 가격이 올라서 망설이다 샀고, 감자는 시들해서 걱정했는데 찌개에 넣으니까 괜찮네, 시장에서 산 초당두부라 역시 고소해, 같은 많은 이야기를 찌개와 함께 끓여냈다. 이제야 나는 엄마가 완도에 사는 이모 친구에게서 산 멸치로 국물을 냈다던가, 하는 말이 들렸다. 


우리는 2인 가족이라 초밥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만들었는데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어야 한다. 얼마 전에도 샌드위치 속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잔뜩 했는데 초밥이가 먹지 않아서 날짜가 지날수록 괜히 초조했다. 배구부 회식해서 고기 먹었다며 배 두들기며 집에 들어오는 초밥이는 나의 이런 초조함 따위 알 리가 없다.     

 

돌이켜보면 나도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을 두고 바쁘다고 뛰어나간 적이 허다했고, 반찬을 스캔하고 대놓고 먹기 싫다고 한 적도 많았다. 그럴 때 엄마 기분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가 있었던 것처럼 아침밥도 당연한 것이었다. 뭘 만들까 고민하다가 언젠가 아이가 잘 먹었던 메뉴를 고르고, 식탁을 말끔하게 닦고, 수저와 물을 놓고, 뜨거울 때 먹으라고 의자에 앉기 직전에 찌개와 밥을 뜨는 걸 알턱이 없었다.      

“내일부터 밥 없어!”     


나는 그렇게 소리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보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는 순간, 이틀 전에 초밥이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랐다. 

     

초밥: 1월 중순부터 전주에서 살기로 했어.
나: 어? 1월 중순이면 한 달밖에 안 남았잖아!

초밥: 이사하고 바로 학교 다닐 수 없잖아. 한 달쯤 학원도 미리 다니고 지리도 익혀야 하니까.
나: 그래. 그래야 하겠지.


아침밥을 해줄 수 있는 날도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안 해준다고 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건 밥을 안 해준다는 말도 처음 했다는 거다. 가족은 언제나 내 옆에 있는 줄 알고 함부로 말해버리고 후회한다. 언제나 내일이 있을 줄 알고.


초밥이가 없는 내일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품에 있던 아이가 떠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유일한 가족이 떠나는 일이기도 하다. 제일 아쉬운 건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일상과 감기까지 공유했던 사람이 사라지는 거다. 날선 감정으로 상처를 주고받지만 그런 사람이 가족밖에 없기 때문에 소중한, 참 모순적인 관계다.


내가 너에게 대나무숲이었던 시간     


초밥이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식탁 위에 던져놓고 말을 시작했다.


초밥: 와, 졸업사진 나왔는데 진짜 이상하게 나온 거야. 사진사 아저씨가 턱을 들라고 해서 나는 당연히 그렇게 했지. 근데 턱이 얼굴의 반인 거야. 완전 어이없어가지고.

나: 사진 보자.

초밥: 재촬영할 사람 신청하라고 해서 교무실에 갔더니 선생님도 나는 다시 찍을만하다고 하는 거 있지.

나: 요즘은 재촬영도 해주는구나.

초밥: 이제부터 극강 다이어트야. 나한테 먹으라고 하지 마.

그러더니 대화를 끝내고 방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나는 방문에다 대고 중얼거렸다.

나: 나는 너한테 뭐야. 대나무숲이야?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나를 대나무숲이라고 생각하는지 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는 너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겠지. 매일매일의 생생한 감정을 나누는 건 이 한 달이 마지막이겠지. 앞으로는 시간이 흐른 뒤에 감정을 삭이고 난 뒤에 만나게 되겠지. 그것대로 새로운 이야기가 있겠지만, 지금은 아쉬운 마음이 크다.


사실 엄마는 좋았어. 밖에서 기분 상한 일이 있어도 감정을 쏟아낼 사람이 너한테 나여서. 내가 너한테 그런 사람이 돼줄 수 있어서.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누군가한테 그런 편한 사람이 돼줄 수 있었을까. 그런데 그 기분이 너무 좋은 거야. 드디어 나에게서 벗어난 것 같은, 나에게 그런 능력을 발견한 기분이야. 그걸 네가 알려줬어. 아직도 종종 급발진을 하지만,  (너는 놀라겠지만) 이만하면 내 감정에서 많이 벗어나게 된 거야. 네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평생 나를 벗어나지 못했을지 몰라.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걸 너를 통해 알게 되었고, 그게 얼마나 커다란 해방감인지 너도 언젠가 느껴봤으면 좋겠다. 

      

한동안은 일상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 같겠지. 밥을 푸다가도 숟가락을 놓다가도 문득문득 네가 생각나겠지. 그것마저도 네가 나를 키워주는 시간이라 여기고 받아들여야지. 멈춰있지 않고 늘 다음단계로 가게 해준 너를 믿고 또 그렇게 나아가봐야지. 커가는 너와 함께 나도 변해갔으니까.


"아침에 미안했어. 몸이 안좋아서 짜증나서 그랬어. 이제 아침밥 해줄 수 있는 날도 한 달밖에 없는데 미안하다."

초밥이한테 이렇게 톡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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