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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0. 2023

기분 좋은 탈진 상태

요즘 나는 김연수 작가에게 푹 빠졌다. 김연수 작가의 글은 마음에 침전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가 그 위에 뜬 맑은 물을 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꾸밈과 과장 없이 스스로에게 진실한 문장 그대로. 책을 읽다 보면 대단해 보이지 않더라도 지금의 나로서 최선인 글을 묵묵하게 써나가는 한 사람이 보였다.     


김연수 작가의 책을 읽다가 미야자와 겐지의 시 <비에도 지지 않고>를 알게 되었다. 김연수 작가는 이 시에 영감을 받아서 산문과 소설을 썼는데, 덕분에 그 글과 함께 시를 음미할 수 있었다. 다음은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 있는 글이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중략)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하면
그 순간 자신에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을 읽고 결과를 위해 열심히 하는 일과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일을 생각해 보았다.      


초밥이와 하는 ‘한 권당 만 원’을 주고 하는 독서토론을 이번에는 <비에도 지지 않고> 시와 <지지 않는다는 말>책 으로 했다. 초밥이가 시와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일부 낭독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엄마는 학원에 일할 때 결과를 위해 열심히 했고, 지금 하는 글쓰기는 결과랄 게 없잖아. 그 순간이 좋아서 하는 것 같아. 등산도 그래. 산을 내려오면 몸에 힘은 하나도 없는데 가슴이 뻐근할 정도로 꽉 차는 기쁨이 느껴지거든? 기분 좋은 탈진 상태라고 해야 하나. 그 기분이 너무 좋아. 너는 어때?     


초밥: 나는 시험공부랑 전교회장 선거 운동은 결과를 위해 한 거고, 축제준비 하는 건 그 순간이 좋은 일이야.      

요즘 초밥이는 축제에서 공연할 춤을 반친구들이랑 연습하고 있다. 춤을 추면 덥다며 12월인데 여름교복을 입고 다닌다. 학교 댄스부인 초밥이가 친구들에게 안무를 가르쳐주는데, 친구들과 동작을 맞춰가고 점점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짜릿하다”고 했다.      


초밥: 또 하나는 주짓수 할 때야.

나: 그만둔 지 일 년이 넘었잖아. 
초밥: 요새도 관장님이랑 페메(페이스북메시지) 자주 해. 

나: 무슨 얘기하는데?

초밥: 사진보정 좀 그만하라고. 도장의 분위기가 그리워. 서른 살, 마흔 살 된 아저씨 하고도 다 친한 그런 분위기.

나: 그 아저씨들하고 어떻게 친해졌는데?
초밥: 스파링 하고 있으면 관장님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웃기니까 자연스럽게 친해져.     


초밥이는 주짓수를 하고 나면 후련한데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쉽다고 했다. 나도 10시간 이상 등산을 하고 나면 몸속에 찌꺼기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들 때까지 몸을 몰아붙이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지난 경험을 비춰보면 결과를 위해 한 일은 끝나고 나면 내가 소모된 기분에다 어딘가 모르게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보상을 줘야 했는데, 주로 그 보상은 술이나 쇼핑 같은 외부에서 얻는 자극이었고, 휴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반면 하는 동안 좋은 일은 끝난 후에 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뿌듯하고 기분이 좋다. 보상이 필요 없고, 편안하게 쉴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하루를 보낸 날은 미련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초밥이 친구 중 한 명이 울면서 시험공부를 하는 걸 영상으로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그걸 초밥이가 보여주었다. 그동안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하면 잘한다”라고 늘 말해왔던 친구였다. 중 3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친구들과 자신에게 증명하기 위해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는데 내가 왜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그건 그 아이에게서 지난 나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으면서 열심히 하는 건 얼마나 어려운지, 겉으로는 열정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한순간에 번아웃 되는 건 얼마나 쉬운지, 이 세상이 나도 모르게 나를 소모시키도록 얼마나 부채질하는지, 그저 열심히 살고 싶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다 타버린 재가 돼버린 자신을 만날 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는 그 황망함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지나왔던 그 길을 그 아이와 또 초밥이가 가게 될까 봐 안타까웠다.   

   



비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보라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결코 화내지 않고 언제나 조용히 웃음 짓고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과 채소를 조금 먹고

모든 일에 내 잇속을 따지지 않고

사람들을 잘 보고 듣고 알고 그래서 잊지 않고

들판 소나무 숲 그늘 아래 작은 집에 살고

동쪽에 아픈 아이가 있다면 가서 돌보아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가 있다면 가서 볏짐을 날라 주고

남쪽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서 두려움을 달래주고

북쪽에 다툼이나 소송이 있다면 의미 없는 일이니 그만두라 말하고

가뭄이 들면 눈물 흘리고

추운 여름이면 걱정하며 걷고

모두에게 바보라 불려도, 칭찬에도 미움에도 휘둘리지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시에서 ‘지지 않고’는 이긴다는 의미보다 꽃이 진다고 할 때 지는 걸 말하는 것 같다. 비와 바람에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는 꽃이 연상된다. 누구와도 경쟁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제 몫의 시간을 버텨내는 삶이 지지 않는 삶이 아닐까.      


이 시를 쓴 미야자와 겐지는 생전에 가난하게 살다가 37세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짧은 생을 마쳤다. <비에도 지지 않고>는 그가 죽기 2년 전에 수첩에 적어둔 것을 동생이 다른 작품과 함께 출간했다고 한다. 곤궁한 삶 속에서도 삶에 대해 고민한 작가를 상상해 보았다. 시인이 생각한 지지 않는 삶은 아픈 사람을 돌봐주고, 지친 사람 대신 일을 해주고, 우리 모두의 일에 걱정하고, 남이 하는 말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었을까.    

 

살다 보면 결과를 위한 일, 하는 순간이 좋은 일 모두 해야 한다. 초밥이가 시험공부도 하고 축제 연습도 하는 것처럼, 내가 과외도 하고 글도 쓰는 것처럼. 어차피 해야 한다면 이 두 가지 일을 구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 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여기까지 생각해봤어. 다음은 네 이야기를 들려줘.

학이 춤춘다는 무학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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