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을 차려놓고 보니 초밥이가 먹을 만한 게 없었다. 반찬은 얼갈이배추된장국에 호박부침개였다.
나: 어? 네가 먹을 게 없네.
나는 조미김을 하나 뜯어주며 말했다.
초밥: 괜찮아. 어차피 배 안고팠어.
나: 호박 부침개 한번 먹어볼래?
나는 부침개를 한입 크기로 잘라 간장에 있는 파를 하나 얹어서 초밥이 입에 넣어줬다.
나: 어때? 달큼하지?
초밥: 내 스타일 아니야.
나: 그래. 지금 밥솥에 뭐 만드는 중이게?
대답도 내가 했다.
나: 시래기밥!
초밥: 윽. 정말 싫어.
나: 그것까지 내놨으면 너 진짜 화냈을 거야. 와하하.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담백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아침밥 메뉴로 호박채전과 얼갈이배추된장국 그리고 시래기밥으로 정했다. 주먹 두 배 크기 호박의 초록색 얇은 껍질을 가르자 샛노랑 속이 드러났다. 호박을 가늘게 채 썰어서 소금 한 꼬집을 넣고 메밀부침가루와 섞어서 부치고 남은 호박은 된장국에 넣었다.
내가 먹고 싶은 반찬 만들기는 초밥이가 어렸을 때부터 죽 그래왔다. 대부분은 나도 좋고, 초밥이도 좋아하는 걸 만들었지만, 내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참지 않았다. 그런 날 초밥이는 오늘처럼 조미김과 계란 프라이로 밥을 먹었다.
며칠 전에도 호박죽이 먹고 싶어서 팥을 한 시간을 삶아서 호박죽을 끓였다. 내가 맛을 보라고 했더니 초밥이는 먹고 ‘윽’하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초밥이가 ‘윽’이라고 한 음식은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미역줄기볶음, 브로콜리, 순두부찌개, 비지찌개는 여섯 살 초밥이는 ‘윽’이라고 했지만, 열여섯 살 초밥이에게는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여섯 살 때나 열여섯 살일 때나 “한번 먹어볼래?”라는 내 말에 초밥이는 순순히 입을 벌렸다. 그건 엄마가 두 번째는 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나.
나는 초밥이와 밥상에 마주 앉으면 "이건 방풍나물, 이건 마늘종, 이건 미나리" 하고 소개해줬다. 한 입 먹어보고 찡그린 녀석의 얼굴을 보고 웃다 보면, 어느 순간 무심하게 그 음식을 집어먹는 걸 발견하는 일이 잦아졌다.
얼마 전 초밥이가 고기쌈을 싸는데 마늘을 두 개 넣는 걸 보고 언제 이렇게 컸나 감개무량해서 쳐다봤더니 초밥이가 훠이, 상추 물을 뿌렸다. 희로애락은 오직 나만의 것이었다. 광어회를 먹을 때 내가 지느러미부터 먹으면 뭘 모르던 시절 초밥이가 “그거 뭐야?”라고 물으면 내가 “이건 못 먹는 거야”라고 했는데, 요새 초밥이는 고소한 지느러미부터 먹는다. 그럴 때는 옛날이 좋았다 싶다.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가 있다. 초밥이가 학교 영어선생님이 들려주었는데 선생님이 노래를 듣다가 울었다고 했다. 나도 4년 전쯤 이 노래를 듣고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있어서 오랜만에 들어봤더니 가사가 와닿지 않았다.
공부해라
성실해라
사랑해라
딸에게 요구하는 부분 때문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엄마의 혼잣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삶은 여전히 내게도 어렵다. 이 정도 살아왔으면 딸에게 해줄 말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빈 주머니밖에 보여줄 수 없는 엄마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바꾸고 싶은 부분은 있었다.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알고픈 일들 정말 많지만
이 부분을 딸이 아니라 엄마가 부르면 좋겠고, <엄마가 딸에게>가 아니라 <딸이 엄마에게>로 바꾸어서 두 사람의 분량을 정확히 반대로 하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아이에게 소개한 반찬은 수만 가지 음식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내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 중에 아이에게 꼭 맞는 것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요리하고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전부가 아닐까.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이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대신하고 싶다.
내가 사랑에 서툴렀던 걸 용서해 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사랑에 진실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니.
https://youtu.be/MPzbTJN5wVc?si=Ff-qjW85NmpOD-5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