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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Dec 25. 2023

여자니까 못해도 돼

아침 8시 30분, 자동차서비스센터에 갔다. 직영점은 갈 때마다 한정 없이 기다려야 해서 영업 시작과 동시에 접수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와 똑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센터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고 접수된 차트가 얼핏 봐도 여덟 개쯤 쌓여있었다.      


내가 수리 의뢰서를 쓰고 있을 때 한 아저씨가 센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저씨의 얼굴에 나와 똑같이 실망과 체념이 순서대로 지나갔다.      


“얼마나 기다려야 돼요?”

출근하자마자 벌써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들었을 직원이 기계적으로 답했다.

“접수 순서대로 정비하는데 소요시간은 알 수 없어요.”

“그럼 그냥 기다려야 돼요?”
“내일 첫 번째로 접수하시면 바로 할 수 있어요.”

내 또래의 여자 직원이 화를 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리 의뢰서를 내밀었다.     

“요소수만 넣으면 돼요?”

“네.”

직원의 물음에 내가 대답하자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했던 아저씨가 말했다.

“요소수는 그냥 넣으면 되지.”

“여자들은 무거워서 못 넣는 사람도 많아요.”

직원이 슬쩍 내 눈치를 보며 말했고, 아저씨는 무심코 한 말에 무안한 지 다른 곳을 쳐다봤다. 

    

무안한 건 오리려 나였다. 나는 요소수를 직접 넣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계기판에 뜬 요소수를 보충하라는 메시지를 보고 아무 생각 없이 서비스센터에 왔다. 26살 때부터 20년을 운전하고도 나는 타이어는 물론 와이퍼를 교체해 본 적도, 워셔액을 내 손으로 넣어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아저씨의 말 한마디에 각성은 한 나는 수리기사님이 요소수를 넣는 걸 지켜봤다. 요소수 주입구는 주유구 바로 옆에 있었고, 셀프주유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아침부터 기다리냐고 한 아저씨 말이 맞았다.    


기사님이 워셔액도 없다며 본넷을 열고 워셔액을 넣었는데 이 역시 간단했다. (나는 본넷을 여는 버튼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차에 타고 계셔도 돼요.”
영하로 내려간 날씨라 기사님이 말했지만, 20년간 차에 가만히 앉아있었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타이어 공기 좀 넣어드릴게요.”     

기사님이 공기를 넣는 호수를 들고 와서 타이어 공기주입구 마게를 열고 호수를 꽂았다. 호수를 빼자 내가 얼른 기사님에게 마게를 받아서 닫았다. 다음부터 내가 마게를 열고 기사님이 호수를 꽂았다.  

   

“배워두시면 좋아요. 타이어 가게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무상으로 공기를 넣을 수 있거든요.”

나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네,라고 대답했다.    

 

나는 왜 요소수와 워셔액을 직접 넣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기계치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여자니까 못해도 돼, 누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던 게 아닐까. 겉으로는 독립적인 척해왔지만, 마음 깊은 곳에 이런 기대가 숨어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십 대 후반, 맞선을 보면 한 번 보고 말 사람일 수 있는데 빚지는 것 같아서 내가 찻값을 냈다. 다른 지역에 사는 분이라면 중간 지역에서 만나자고 제안했고, 처음 보는 남자의 차를 타지 않으려고 내 차를 가지고 갔다.     

초밥이 아버님과 선을 본 날도 내가 차로 데려다주고 식사비를 냈는데, 그분은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결혼 후 그 분과 나는 각자 돈을 벌어서 썼다. 강아지 구입 비용과 여름휴가비도 공평하게 반씩 부담했다.      

그렇게 살아보니 나는 전혀 독립적인 여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영화 보고 밥 먹고 차 마시는 데이트만 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사는 일은 공평하게 나눌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내가 물려받은 문화는 공평하지 않았다. 직장에 나가도 아이가 어렸을 때는 엄마 역할이 클 수밖에 없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나는 시댁행사를 챙기면서 남편은 친정에 어떻게 하는지 따지는 속 좁은 사람이 되어있었다.     

 

솔직하지 못한 내가 문제였다. 누가 밥 사주고, 대신 운전해 주면 편하고 좋잖아. 좋은 걸 좋다고 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좋든 나쁘든 내가 살아온 환경과 이전의 문화에서 만들어진 기대가 있다면 그것대로 인정하고  조금씩 바꿔갔어야 했는데, 허공에다 집을 짓듯 보이고 싶은 모습에만 치중했다. 


독립은 차를 운전하는 모습만큼 그럴듯하지 않고 타이어 공기와 요소수, 워셔액을 직접 넣는 것처럼 자잘한 노동이 따르는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아지 구입 비용과 여름휴가비도 공평하게 반씩 부담했던 9년의 결혼 생활은 나를 독립적인 여성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 척으로 시작했는데 진짜 그렇게 된 거다. 이걸 그분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지.

  

초밥이한테 상반되는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첫째, 나의 본심을 속이지 말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숨기면 그게 쌓여 벽이 되고 외로워지니까. 둘째, 그래도 의존하지 말기. 내 차를 운전하는 것 이상으로 내 삶을 스스로 운용해 가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뿌듯하니까. 그걸 위해 타이어 공기, 요소수, 워셔액은 직접 넣고 말이야.


서로 의지하며 살기 위해 결혼했는데 의존하지 말라니, 그러게 사는 게 그렇게 말이 안 되는 일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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