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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Nov 13. 2024

늦게 도착한 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수학여행 잘 갔다 왔나?” 

나 말고 초밥이가 수학여행 잘 갔다 왔는지 묻는 거다.

“어제 도착했데요.”

“배 타고 갔나?”

“인천공항에서 비행기 타고 갔데요.”

“영어 대회 잘했다 카드나?”

“언제 하는지 몰라요.”          


엄마는 나한테 전화해 놓고 기껏 묻는 건 초밥이 근황이다. 이러니 초밥이와 함께 있게 되면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야 할 것 같다. 어느 주말, 내가 “할무니한테 전화해 보자”라고 해서 초밥이가 영상통화를 걸었다. 화면에 초밥이와 내 얼굴이 나타났다.      


나: 내 얼굴 왜 그러냐? 너랑 비교하니까 세월의 무서운 힘이 느껴진다.

초밥: 엄마, 볼에 바람 넣어봐.

시키는 대로 했다.

초밥: 그래도 팔자주름 안 없어지네.          


그때 우리 얼굴은 구석으로 밀려나고 엄마 얼굴이 전면에 등장했다. 25년, 30년 간극이 있는 삼대의 얼굴이 화면을 채웠다. 엄마와 나는 25년, 나와 초밥이는 30년이라는 시간의 강물이 흘렀다. 비슷한 세 명의 얼굴이 마치 한 사람이 나이 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나: 어무이!

초밥: 아이고, 우리 새끼 집에 왔나? 수학여행 잘 갔다 왔나? 엄마 밥 해주더냐? 뭐 먹었노?

내가 불렀는데 대답은 안 하고 초밥이한테만 질문을 쏟아내는 엄마.    

초밥: 제육볶음이랑 김치찌개 많이 먹었어.

엄마: 그래. 엄마가 밥 해줬으이 인자 공부 해야 되겠다. 그쟈?     


초밥: 할머니 화장 왜 했어? 어디가?

엄마: 예식장 갈라고 미장원에서 드라이했는데 이만 원이나 달라카는 거 있제. 원래 가는 데는 만원만 받는데. 비싸제. 그쟈?

초밥: 머리 예쁘네. 잘했어.

엄마: 인자 나가야겠다. 끊제이. 엄마 옆에서 쉬다가 공부하고 그래래이.  

        

초밥이와 나는 할머니는 모든 대화가 기승전공부라며 웃었다.        


  



지난여름, 초밥이가 할아버지가 용돈을 보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통장을 확인해 보고 내가 안 왔다고 했더니 초밥이는 아빠한테 받은 게 있다고 안 보내셨나 하면서 아쉬워했다.   

       

나: 할아버지한테 말해줄까? 너 목 빼고 용돈 기다리고 있다고?

초밥: 하지 마, 하지 마, 진짜 하지 마!        

  

기겁하는 초밥이가 재미있어서 놀렸는데 며칠 후, 아빠한테 전화가 왔길래 이 얘기를 꺼냈다.       

   

“초밥이가 할아버지가 용돈 보냈냐고 묻던데요?”

“내가 용돈 보내준다고 했거든. 괜찮다고 하던데 그래도 보내준다고 했어. 오늘은 바쁘고 내일 엄마한테 보내라카께.”          


다음날, 엄마가 계좌번호를 묻기 위해 한번, 돈을 보내고 나서 잘 들어왔냐고 확인하기 위해 또 한 번의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돈이 들어오자마자 초밥이 통장으로 송금했고 곧바로 답장이 왔다. 

         

“헐, 짱이다다다다다.”          

“할머니가 돈을 이체하는 방법 알려줄까? 볼펜과 메모지를 준비하고 전화를 해. 불러주는 계좌번호를 받아 써. 번호를 부르면서 세 번 확인해. 은행으로 가. 이체종이에다 숫자가 틀리지 않는지 신중하게 꼭꼭 눌러서 써. 창구 앞에 기다리다가 직원한테 종이와 돈을 내고 확인증을 받아오는 거야.”        

  

엄마가 송금을 한 날은 유난히 더웠는데, 양산을 쓰고 은행에 가는 엄마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저릿해왔다. 부모님이 손녀를 대하는 걸 보면 내가 보지 못한 모습이라 낯설 때가 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로 공부가 힘들다는 손녀에게 아빠는 “급하게 마음먹지 말고 천천히 해. 일 년쯤 지나야 습관이 잡히겠지”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초밥이가 울었다고, 엄마가 전해주었다. 나중에 내가 초밥이한테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모르겠다고 그냥 눈물이 났다고 했다. 초밥이가 언젠가 할아버지한테 쓴 편지에는 할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고 적혀있었다.      


천천히 해.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손녀 마음이 다칠까 봐 조심스럽게 말하는 아빠를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아빠도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 모른다. 책임감 때문에 꺼내지 못했던 아빠의 진심. 뒤늦게 듣게 된 말. 천천히 해. 나한테 하는 말 같다.

     

수학여행 재미있드나, 맛있는 거 먹었나. 초밥이한테 질문을 쏟아내는 엄마를 나는 물끄러미 보게 된다. 내 기억에 엄마가 내 기분을 물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팍팍한 생활 때문에 하지 못한 엄마의 진심. 뒤늦게 도착한 질문. 수학여행 재미있었나. 나한테 하는 말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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