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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정 Nov 16. 2024

책 읽으면 뭐가 좋아?

“책 읽으면 뭐가 좋아? 책에 빠져있다 보면 해야 하는 일을 놓치기도 하잖아.”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에 지인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책을 통해 불쑥 떠오른 생각과 감정이 해야 하는 일 앞에서 필요 없는 것 같고, 때로는 현실도피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한참 책에 재미를 들였을 때 나는 학원에 일하고 있었다. 짬이 날 때마다 조용한 곳을 찾아서 책을 펼쳐 들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궁금하고 흥미로운 책이 늘어나더니 신입생 상담이 왔는데 책장을 덮는 것이 아쉬운 지경이 되었다. 학생이 결석을 하면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반가웠고, 급기야 퇴원생이 늘어서 폐강이 되자 기뻐하는 나를 발견하고 학원을 그만두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직감했다.      


온종일 책을 읽고, 떠오른 생각에 매달리고 싶었다. 생각이 흩어지고 이어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싶었다. 하나의 책에서 궁금하게 된 또 다른 책을 구하기 위해 주말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마음에 드는 작가를 발견하면 그 작가의 책을 모조리 읽어 내려가고 싶었다.  

   


지금은 학원을 폐업한 지 5년 6개월이 흐른 시점이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누운 채로 이십 분 정도 책을 읽는다. 일어나서 매트를 깔고 스트레칭을 25분 정도하고 커피와 레몬수를 만들어 거실 탁자 앞에 앉는다. 그날 마음이 가는 책을 집어 들고 30분에서 1시간 정도 책을 읽다가 글을 쓴다. 산에 가는 날이 아니면 평일이든 주말이든 이어지는 루틴이다. 매일 반복하지만 한번도 싫증 난 적 없이 새롭게 기쁘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아침을 열 수 있어서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이 소중한 시간을 지켜내기 위해 저녁에 하는 과외도 잘하자는 다짐을 할 만큼.     


시간이 있다고 책을 읽고 요가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충분한 시간이 있어도 하지 못한 시기가 내게도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동하고 흐르는 걸 응시할 수 있는 여유, 시간보다 그런 여유가 있어야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걸 지금에야 알게 되었다.    

 

소설 <섬에 있는 서점>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났다.   

  

“서점은 올바른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당겨. 에이제이나 어밀리아 같은 좋은 사람들. 그리고 난, 책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책 얘기를 하는 게 좋아. 종이도 좋아해. 종이의 감촉, 뒷주머니에 든 책의 느낌도 좋고. 새 책에서 나는 냄새도 좋아해.”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바꾸어보았다.     


“책은 올바른 종류의 것들을 끌어당겨. 내 안에 있는 사려 깊음, 너그러움, 이해심 같은 것들. 책을 읽는 동안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을 살살 만지는 게 좋아. 감수성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소설에서 마야는 자신을 버린 생모에 대해 글을 쓴다. 대학생 신분으로 혼자 아이를 낳아 기숙사에서 2년간 아이를 키운 사람을 상상한다. 위탁가정에서 자란 여자는 위탁모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 이상 장학금을 받을 수 없어서 학비와 양육비가 필요했던 어린 엄마는 아이를 남긴 채 세상을 떠나는 선택을 하고 만다.     


마야가 쓴 글은 작가에게 글쓰기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말해주었다. 작가는 어둡지만 나의 정체성이 시작되는 곳을 직면하고 밖으로 끌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고, 웅크리고 있는 그것을 펼쳐낼 때 비로소 작가로서의 삶이 시작된다고 말이다.     


진실은 그럴 때에만 볼 수 있다. 생모가 자신을 버린 건 사실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대학생 신분으로 혼자 아이를 낳은 사람을 그려보지 보지 않고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아이를 낳는 결심을 하기까지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아이를 두고 떠나는 엄마의 무너지는 마음이 되어보지 않고, 알 수 있는 건 없다. 사실이라는 작은 땅 아래에 진실이라는 거대한 뿌리가 묻혀있다.


해가 잘 드는 땅에 꽃이 피어있는가 하면 볕이 들지 않아 어둡고 습한 땅에 이끼가 가득한 것처럼, 내게 일어난 일도 무심히 일어난 수많은 일들 중에 하나라는 진실, 생모는 세상을 등지고 말았지만, 그 하나의 불행이 에이제이라는 좋은 아버지를 만나는 행운과 이어졌다는 진실도. 그리고 한 가지 더 있다. 

    

“저는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책에 둘러싸여, 그런 것들을 중요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기를 바랍니다.”     


바로 엄마의 진심. 아이가 자라서 사실보다 진실을 알게 되기를, 무심히 일어난 일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기를 엄마는 간절히 원했는지 모른다. 그것이 아이를 남겨두고 떠나는 엄마가 주는 최선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나는 책을 읽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을 잘하려고 애썼던 시절보다 독서와 글쓰기를 하는 지금이 삶에 대한 애착이 커지는 걸 느꼈다. 보이는 것 이면에 있는 의미와 진심을 발견하는 일은 일상을 다채롭고 새롭게 했다. 주변의 작은 변화에 감동하고 공감하는 일이 늘어났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충실하게 살도록 이끌어주는 것 같다.   

책을 읽고 있으면 세상과 동떨어져 있는 기분이 든다. <섬에 있는 서점>은 그 기분을 잘 표현한 제목이다. 섬에 있는 서점처럼, 섬처럼 홀로 있는 것 같다. 반면 세상을 더 잘 들여다보게 하고 사람들과 연결해 주는 것도 책이다. 책을 읽어갈수록 그 어느 때보다 세상 속에, 사람들 속에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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