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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낳은 사람과 내가 낳은 사람

by 김준정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깨서 시간을 보니 새벽 4시였다. 싱크대 물소리와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서 아무래도 다시 잠들기는 틀린 것 같았다. 거실로 나오니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거실탁자 앞에 앉아있으니까 초밥이가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나와 내 옆에 앉았다.


나: 나도 못 자는데 남도 못 자게 하자는 심사였어?

초밥: 설마 시끄러워서 깬 거야? 최대한 조용히 한 건데? 배고파서 포도 먹으려고 포도를 씻는데도 물을 살살 틀고, 발소리 날까 봐 까치발 들고 다녔어
나: 그럼 네가 조용히 하는 그 방법에 문제가 있나 보다. 다음에는 조용히 하지 말아 봐라.

초밥: 일찍 일어나면 좋은 거 아니야? 책 읽고, 글 쓰면 되잖아.
나: 나 지금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야?

우리는 새벽 한담을 나누고 흩어져서 각자의 책상에서 두어 시간을 보냈다. 내가 밥을 하려고 막 일어서는데 초밥이가 방에서 나왔다.


“엄마, 이것 좀 가르쳐줘. 오늘 수행평가 봐.”


초밥이가 내민 것은 도함수 활용 문제였다. 나는 15분 동안 무료 강의를 하고 시간이 촉박해서 서둘러 양념돼지갈비를 굽고 무생채를 만들고, 브로콜리를 데쳐서 무쳤다.


“와, 진수성찬이네.”


초밥이는 돼지갈비부터 하나 잡고 뜯었는데 먹으면서 휴대폰으로 시간을 거듭 확인했다. 버스 시간은 7시 48분이고, 그때는 7시 34분이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안돼보여서 내가 말했다.


“태워줄 테니까 천천히 먹어.”

“아냐. 버스 타고 갈 거야. 손 씻고 바로 가면 돼.”


나는 속으로 “예스!” 쾌재를 불렀지만, 돼지갈비 한 개와 시간을 저울질하는 사람을 차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진짜 데려다줄게.”

“그럼 그럴까?”


초밥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더니 살이 두툼하게 붙은 갈비 하나를 집어 들었다.



*


잠시 후 내가 식탁을 치우고 있는데 초밥이가 내 방에서 나오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나 오늘 엄마 패딩조끼 입는다!”


입어도 돼? 허락을 구하는 것도 동의를 묻는 것도 아닌, 입을 테니까 그런 줄 알고 있으라는 통보였다.


초밥이는 전생에 나의 목숨을 구한 게 틀림없다. 잠을 깨워놓고도 당당하고, 수학 가르쳐달라고 요구하고, 진수성찬 아침밥을 받고, 내 옷을 입고, 헥헥, 내가 차까지 태워주기까지. 오늘 아침만 해도 무려 다섯 가지 보답을 받았다. 그런데도 학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자꾸 까불어서 “내려”를 세 번을 말하게 했다.



*


집에 돌아와서 노트북을 켜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어제 커피 사러 갔는데 전부 컴퓨터로 눌리가 사가지고 가는데 나는 못해가 있으니 아무도 거들떠도 안 보는 거라. 그래가 그냥 서있다 왔다. 거 돈 여논거 계좌로 도로 부치 달라 캐라.”


지난 추석에 나는 부모님 집 앞에 있는 커피숍에 5만 원 선결제를 해두었다. 엄마가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서 운전을 하고 있던 아버지에게 커피가게 앞에 차를 세우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쓸데없는데 돈 쓴다며 쌩하고 지나갔다는 말을 엄마에게서 듣고 내가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군산집으로 돌아와서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 이름 대고 주문하면 돼요”라고 하자 엄마가 얼마나 신나 했는지 모른다. 나도 엄마가 아버지 앞에서 보란 듯이 커피를 마시고, 아파트 정자에서 함께 윷놀이를 하는 친한 분들한테 커피를 사는 모습을 상상하고 혼자 키득거렸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 드디어 커피를 사러 갔는데 다른 사람들 사가는 것만 지켜보다가 돌아왔으니 엄마가 실망하는 건 당연했다.


“아... 키오스크... 어른들은 그냥 주문받아주지, 손님이 많았나? 엄마, 이렇게 하면 어때요? 미리 전화로 주문하고 찾아가는 건 할 수 있죠? 내가 그렇게 해도 되는지 커피숍에 물어볼까요?”


“그래도 된다카면 나한테 전화번호 알려도.”


나는 인터넷 검색으로 커피숍을 찾아서 전화를 걸었다. 내 이름으로 선결제되어있는 걸 확인한 뒤 말했다.


“저희 어머니가 키오스크 사용을 못하셔서 그러는데 혹시 전화로 주문하고 찾아가도 될까요?”

“아네. 가능해요.”

“번거로우실 텐데 편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소보다 말투가 공손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


추석 전날 초밥이와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갔었다. 내가 앞서 걷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봤는데 초밥이와 엄마가 나란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는데 괜히 코끝이 시큰해왔다. 나를 낳은 사람과 내가 낳은 사람이 함께 하는 다정한 시간이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마음에 둘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엄마가 새우, 오징어, 명태포, 채소 등등을 살 때마다 초밥이와 내가 번갈아서 나눠 들었다. 마지막으로 엄마가 쌀을 사야 한다면서 단골 쌀집으로 향했다. 엄마는 사장님과 한참 안부를 주고받다가 원래 먹던 걸로 달라고 하자 사장님이 10kg짜리 쌀포대를 가지고 왔다. 내가 쌀포대를 앞에 두고 쳐다보자 초밥이가 그러는 거다.

“우리 중에 엄마가 힘 젤 세잖아.”


나는 비닐봉지를 팔에 주렁주렁 건 채로 쌀포대를 가슴에 안았다. 이 무거운 걸 우리 엄마는 이제까지 어떻게 들어왔고, 앞으로 얼마나 들 수 있을지를 생각하니 팔이 아니라 가슴이 저릿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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