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에서 한 옷가게가 동네업체홍보란에 올린 게시물을 보았다. 하늘색 티셔츠, 빨간색 야구모자, 청반바지를 매치한 사진이었는데 주인의 남다른 감각이 엿보였다. 가게 위치를 보니 마침 우리 집 근처였다.
토요일, 초밥이를 스카에 데려다주는 길에 초밥이한테 옷가게에 들러보자고 했더니 좋다고 해서 함께 갔다. 옷가게는 나의 단골카페 옆이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인은 나보다 서너 살 아래로 보이는 여성으로 성격 자체가 밝아서 같이 말을 주고받다 보면 기분을 들뜨게 하는 분이었다. 나는 가게에 들어설 때부터 비싸면 그냥 나올 작정이었는데, 어느새 적극적 모드가 변해서 이것저것 옷을 고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 가게의 옷들은 예쁜데 기특하게도 가격도 착하지뭔가. 거기다 주인이 “여름옷 정리 세일해서 20프로 추가할인 들어가요”라는 불쏘시개를 던지는 바람에 지름신이 불같이 일어나서 위아래로 세 벌을 샀다. 그나마 12만 원으로 출혈이 크지 않은 게 다행이다.
그리고부터 한 달 반이 지나고 추석연휴를 하루 앞둔 날, 두 번째 방문을 했다.
“언니 잘 왔어요. 언니한테 어울릴만한 옷 있어요. 딱 이렇게 입어보세요.”
주인장은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셔츠와 바지를 건네주었다. 나는 순순히 옷을 받아 들고 피팅룸에 들어갔다.
주인: 어머머머, 완전 언니 옷이다. 키가 커서 너무 잘 어울린다. 이 옷 떼오기를 잘했네. 주인이 여기 있었네.
나: 괜찮은 거예요?
주인: 모르겠어요? 들어올 때 하고 지금 다른 사람 되었잖아요? 완전 CEO 같아요.
나: CEO 하하하.
사장님이 청원피스를 꺼내와서 또 내 옷이라며 입어보라고 했다. 내가 입고 나오자 그거 보라며 자기 말이 맞다며 장담을 했다. 이번에도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사장님이 그렇다고 하면 맞겠죠” 하고 처음에 입은 옷과 청원피스를 담아달라고 했다. 사장님이 퀄리티가 좋아서 큰맘 먹고 가지고 왔다는 정장셔츠와 바지는 나의 예상을 웃도는 가격이었다. 거기다 사장님이 어깨에 걸치면 멋스러움이 배가 된다는 카디건과 벨트도 가져가라로 해서 나는 맡겨놓은 옷을 찾아가는 기분으로 26만 원을 지불했다. 이번에는 출혈이 꽤 컸다.
가게를 나올 때쯤에는 공연히 돈을 쓴 것 같아서 후회가 되었다. 이제 뭘 입어도 거기서 거기고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는데 하고 말이다.
*
다음날, 토요일 오전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새 옷을 입었다. 그리고 자고 있는 초밥이의 방에 들어가서 왔다 갔다 하면서 중얼거렸다.
나: 사긴 했는데 환불할까 고민 중이야. 별로지? 원래 있는 옷들하고 차이가 없지? 괜히 돈만 쓴 것 같지?
초밥이가 벌떡 일어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초밥: 엄마! 뭐야? 정말 괜찮아. 어디서 샀어?
나: 진짜? 그 가게 있잖아. 우리 같이 갔던데.
초밥: 엄마가 골랐어?
나: 아니. 사장님이 무조건 내 옷이라고 가져라고 그래가지고, 사실 지금도 나는 괜찮은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초밥: 와! 사장님 센스 대박이네. 내가 다 고맙다.
자기가 왜 고맙다는 건지. 촌스러운 엄마를 구제해줘서 고맙다는 뜻인가.
나: 하나 더 있어. 잠깐 있어봐.
초밥이의 격한 반응에 나는 신이 나서 정장바지와 셔츠를 벗고, 함께 구입한 청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초밥: 와! 이것도 괜찮다. 젊어 보여. 아까 그건 세련돼 보이고.
나: 그래? 이건 45,000원이야. 싸지?
초밥: 그 사장님 저렴하고 예쁜 옷 잘 가지고 오네.
*
문득 얼마 전에 초밥이와 함께 대형마트를 갔을 때가 떠올랐다. 마트에 들어서자 정면에 중년 여성들 옷을 판매하는 매대가 보여서 나는 별생각 없이 그리로 갔다. 원피스 하나가 괜찮길래 몸에 대보고 “어때?”하고 물으니까 옆에 초밥이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초밥이는 혼자 매장 안에 들어가 있었다. 내가 부르니까 초밥이가 와서 하는 말이,
“우리 엄마가 이런 옷을 고르다니 충격이야.”
그 한마디에 나는 옷을 제자리에 걸고, 마트 안으로 향하면서 그랬다.
“예전에 나는 패션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는 사람이었거든? 그런데 지금은 있잖아. 길을 잃은 기분이야. 무슨 옷을 입어도 별로여서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르는 기분, 너는 모르지?”
정말 다채로운 인생이다. 하나의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여러 사람의 삶을 살아보는 것 같다. 딸한테 옷을 보는 안목이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리라고 이십 대에 나는 상상이나 했을까.
가끔씩 사치를 하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불안했다. 소비를 절제하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다. 어쩌면 과거에는 즐거움을 주는 통로가 소비 하나밖에 없어서 매달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글쓰기와 등산이라는 새로운 통로가 생겼으니 조금은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가까운 곳에 내 취향을 대신 찾아주는 옷가게가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