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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에서 전업주부가 할 수 있는 일은?

by 환오

어느순간 내 두 발은 공중부양을 하며 춤을 추고 있었고

소변이 마려워도 화장실을 못 가서 방광을 조이고 있었다.

이럴줄 알았으면 성인 기저귀라도 차고 왔어야 했나싶다.


정령 이 노동에 대한 대가는 시급 12000원이 정당한 것입니까!!

나도 모르게 외치고 싶었다.


당근알바를 통해 어렵게 구한 고깃집 서빙 알바.

2주동안 주말만 일하는 단기 알바였다.

전에 하루만 일했던 고깃집보다 시급 천원이 비쌌기에 냉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원했다.

그 천원의 임금인상으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차가 없으면 갈 수 없는 위치였지만, 주말 점심때가 되면 대기가 10팀은 넘을 정도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심지어 일하는 동안 둘째 아이한테 열감기가 심하게 와서 친정엄마가 나머지 일정은 못 나간다고 연락하라며 다그치셨다.

하지만 아무리 단기알바더라도 내 입으로 한다고 했으면 책임을 지는 성격이다.

2주 동안 보고 안 볼 사람들이었지만, '이래서 애엄마들은 안돼.' 하는 선입견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융통성 없는 대꼬챙이 같은 성격.

내 새끼가 열이 펄펄 끓는데도 눈을 질끈 감고 기어이 일을 나갔다.


왜 그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왜 그렇게 납작 업드렸을까.

왜 그렇게 남들한테 피해주는걸 싫어했을까.


과할 정도로 이타심이 강하다. 이타적이기 전에 나부터 돌봐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나를 별로 아끼지 않았다. 어릴적부터 엄마아빠의 기분을 맞춰드리려 노력을 많이 했었다. 엄마아빠가 싸우지 않기만을 바라며 열심히 공부에만 매진했었다. 다친 내 마음보다 그들이 우선이었다.

그런 가정환경 탓인지 어딜 가나 상대방을 먼저 배려하려는 버릇이 있다.

나 때문에 피해가 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꺼내놓고 나니 이건 좀 슬픈 이야기이다.



며칠 뒤, 그 고깃집에서 평일에 일해달라며 연락이 왔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당시 5살인 둘째를 외면하면서까지 일한 내 마음은 역시 편치 않았던 거다.

평일이라고 아이가 안 아프다는 보장이 있을까..


슬프지만 40대 초반의 경력단절 아줌마를 채용해 줄 업체는 많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아이들 때문에 일반적인 나인투식스의 회사 근무는 불가능했고,

파트타임 알바라도 구하면 다행이다 싶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과 학교에 가 있는 오전 시간을 생각했지만, 그렇게 짧은 시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밤마다 애들을 재우고 눈알이 빠져라 매일같이 핸드폰으로 검색 또 검색을 해댔다.


평일에는 일할 수 있는 시간대가 없었고, 결국 두 눈은 또다시 ‘주말 알바’ 쪽으로 돌아갔다.

‘할 수 있겠지?’라는 무모한 기대와 함께.


애들은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일단 넣어보자!


아, 드디어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집 근처 치킨집 알바가.

20대 초반 밀레니엄 시절, B사 치킨집에서 꽤 선수급으로 치킨을 잘 튀겼더랬지.

당시 내가 다닌 치킨집은 전국 매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집이었다.


한 여름밤, 뜨거운 기름 앞에서 치킨이 아니라 내 몸뚱아리를 튀겼었다.

일은 힘들었지만 당시 비슷한 또래의 동네오빠, 동생들과 나름 청춘드라마(응?)를 찍으면서 일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 나의 20대는 '알바의 신' 그 자체였다.

채용만 되면 사장님 마인드로 열심히 할 테야! 이랬지만..


이력서를 넣어도 내 기대와 달리 연락은 오지 않았다.

치킨알바 경력도 썼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보다.

하긴, 그 경력이라는 게 20년전 경험이었으니..

에휴, 괜히 썼나보다.


그 다음 유명한 D사 매운 떡볶이집이나 또 다른 음식점 서빙일도 집과 가까워서 쾌재를 부르며 넣었는데 연락 온 데는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내 나이가 문제인 건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점점 쪼그라들었다.

안그래도 낮은 자존감이 지하를 뚫고 지구의 핵까지 닿을것 같다.


수학학원 채점 알바 자리도 넣어봤지만(심지어 이건 시급 15000원) 대학교 졸업장은 큰 메리트가 없었다. 나름 인서울 나왔는데 이건 되겠지 라는 오만한 자존심이 와장창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하긴 같은 조건이면 어린 대학생들 쓰겠지 풉 나도 모르게 씁쓸함이 올라온다.


고3때 수능이 끝나고 처음으로 동네 돼지갈비 집에서 알바를 하게 되었다.

당시 어린 내 모습이 기특해보였는지 어떤 아저씨가 팁으로 만원을 주셨었다.

그런데 그 테이블에 나보다 서빙을 더 나갔던 한살 어린 동생이 팁을 내가 받은 것에 대한 서운함을 내비쳤는지 사장 언니는 나를 따로 불러냈다.


"환오야, 너 혼자 가지는건 좀 아니지 않니? 서빙은 OO이가 가서 했는데"


내 인생 첫 알바였고 그런 상황이 많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잘못한건지 죄송하다고 해야하는건지 감이 오질 않았다.

결국 그 날의 돈은 나눠 갖게 되었고 갈비집 알바의 끝은 월급을 주지 않으려는 사장 때문에 엄마는 가장 아끼는 코트를 입고 내 대신 따져주셨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된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 수많은 알바를 거쳐 내 등껍질은 점점 단단해져갔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근앱에서 하루 단기알바로 드디어 연락이 왔다!

고깃집 서빙이야 20대 많이 해봤으니 어렵지 않겠지 생각했으나 처음 보는 포스기와 테이블 번호를 하루 만에 습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그날 알바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가족이 운영하는 음식점이었는데, 아마도 사장님 내외분 모두 따뜻하게 대해주셔서 편안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이 일한 처음 본 청년 알바생과의 합이 좋았다.

그도 다니는 직장이 있는데 주말에 하루 일당으로 지원해서 왔다고 한다.


"요즘 청년들 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요?"


나는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져서 물어보니 그렇다고 대답을 한다.

이러니 내가 안 뽑히는구나. 젊은 청년들도 투잡을 뛰는 세상이라니.


하지만 두번째 일한 고깃집에서 화장실도 못가는 경험으로

당근에서 알바 검색은 그만 두기로 했다.

급한 마음에 '땀'으로 벌은 돈이 통장에 찍혔지만 그 돈은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이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20대의 펄펄 날았던 나와 지금 40대의 나는 전혀 다른 조건이다.

아직 어린 내 아이들을 변수로 고려하지 않았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지.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구하지 말고 나한테 맞는 일을 좀 더 고민해 보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직업은 남에게 피해를 주는 나쁜 일이 아닌 이상 존경받아 마땅하다. 누군가의 주머니에서 떳떳하게 돈을 빼오는 일은 세상 치사하고 고단한 일이 아니던가. 그 치사함이 어떤 의미인지 경제활동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알 것이다. 20년 만에 다시 경험한 고깃집 서빙일은 나에게 많은 걸 느끼게 해줬다. 몸으로 때우는 일은 고되고 힘든 돈벌이였다.

10년을 한 직장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한 나로서는 그야말로 오랜만에 육체노동이었다.

하지만 힘든만큼 보람도 있었다. 정직하게 벌은 내 돈이으니까.


그리고 그걸 업으로 삼은 엄마들이 진심 존경스러웠다.

어느 음식집이던 물잔을 건네주는 서빙 하시는 분들께 늘 고맙다고 인사를 드린다.

그들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밝은 내 인사가 조금이라도 힘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지친 그녀들의 일상이 오늘 하루도 평온하기를 나즈막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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