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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선 Apr 09. 2021

빛나는 꿈은 어떻게
나를 붙잡는 우상이 되었을까

한서원 <일과 영성> 신앙 에세이

어린 시절 나는 꿈을 붙잡고 살았다. 가난한 가정 그보다 더 팍팍한 사랑 없는 공동체, 매일매일이 흩날리는 모래 먼지와 같은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 울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하루들의 끝에서 희망이냐 정말이냐, 삶이냐 죽음이냐를 숱하게 선택해야 했다. 때때로 지속되는 고통에 좌절의 쓴 맛을 봐야 했지만 언제나 그 끝은 삶을 택했다. 희망으로 새 소망을 잡았다. 그렇게 미래의 대한 밝은 꿈만이 현실을 버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다. 


나는 스스로 두 가지 훈련을 했다. 첫 번째는 내 자존감을 스스로 찾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믿음이었다. 그 훈련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무의식 속에 나를 지배했다. 기억하건대 초등학생 때부터 나는 나를 소중하게 여겼다. 내 가치와 잠재력이 얼마나 클지 기대하는 것은 가장 즐거운 상상이었다. 밤이면 초등학교 운동장을 돌며 하늘을 봤다. 드문 드문 보이는 별 빛들이 건네는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별들을 세어보곤 했다. 하나, 둘, 셋...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따라 나는 별 하나의 무엇을 되네이고 있었을까. 윤동주 시인만큼은 아니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유치할 수 있는 그때의 내가 지었던 문장을 늘 떠올리며 뿌듯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 잠재된 가능성은 저 하늘 위에 떠 있는 별들과 같아. 도심의 공해로 오염된 하늘이 별들을 가렸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많은 별들이 있는 것처럼. 여러 안 좋은 환경들로 가리어져 있을 뿐이지 내 가능성은 별들 만큼이나 수 없이 많다.' 


두 번째 믿음은 신앙을 통해서였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성경에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성장한 인물이 삶에서 축복을 받는 일은 꿈을 꾸게 해주는 좋은 동기였다. 대표적으로 요셉의 이야기가 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꿈꾸었던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드신 일은 누구에게나 깊은 감명을 준다. 나는 청소년기 시절에는 위인전을 자주 읽었다. 그때 대부분의 위인들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러한 성장 환경을 통해 사회에 영향력을 미치는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스토리가 좋았다. 그들 중에 크리스천이 있노라면 '역시 하나님은 깊은 고통만큼, 그 사람을 높여주셨어!'라고 기뻐했다. 또 설교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일수록 단련을 위한 고난을 허락하시고, 고통이 큰 만큼 더 많이 사용하실 계획이 있으시다.' 등의 메시지를 붙잡았다. 역경 이후의 성공이 오는 스토리가 내 삶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문득문득 현실이 버거운 순간, 고통으로 내면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너무 힘들어요. 주님께서 이 고통의 깊이만큼 훗날 저를 높이 사용하실걸 믿습니다. 

그러니 이 기간을 버텨내 보겠습니다."


그 시절 내 꿈은 특정 직업으로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다. 그저 막연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 남들이 보기에 멋진 사람, 돈을 잘 버는 사람' 등 그냥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싶었던 마음이 내 꿈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되돌아보면 어린 시절 꿈을 잡던 나는 그리 긍정적인 사람도, 내면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힘든 시기를 이겨낼 수 있도록 스스로 만든 보상심리에 불과했다. 그래야만 현실에 숨통이 조금 트였기 때문이다. 그때 붙잡었던 꿈은 오직 내가 비참한 현실을 살아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고통 속에서 

꿈을 붙잡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힘든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꿈을 붙잡는 게 어떻게 나쁘겠는가. 낙담하여 탈선의 길로 빠지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다. 절망 속에서 인생을 비관만 하고 있기보다 소망을 붙잡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선택인가.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놓지 않을 끈이 필요하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믿음으로 이겨내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면 적극적인 응원을 드리고 싶다. 어두운 현실을 밝혀줄 내 마음 안의 한 줄기 빛의 소망을 앗아갈 수 있는 자격은 타인에게 없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그 빛은 예수 그리스도란 사실이다. 꿈 그 자체가 빛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나의 꿈이 되어야 한다. 복음이 빠진 꿈은 빛이 아닌 곧이어 거세게 휘몰아칠 폭풍우에 불과하다. 우리가 붙잡는 꿈은 세상적인 기준위에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꿈을 좇으며 달리는 길 위에는 점점 비교의식, 자격지심, 강박, 세속주의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쉽게도 어둠 속에서는 한 줄기의 빛이 너무 간절해 내가 어떻게 붙잡고 있는지 제대로 볼 겨를이 없다. 그저 그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할 뿐이다. 내 마음 안에 예수님 함께 동행하고 계시는지는 그 꿈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내 안의 진위가 발견된다. 예를 들어 연예인들 중 뜨고 나서 변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연습생 시절에는 그토록 간절한 태도와 겸손한 모습으로 허리 숙여 인사하던 사람들이 뜨고 나니 거만해지는 경우가 있다.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거나,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면서 서서히 변한 것일 수 있다. 무엇이든 간에 그 마음의 중심에는 높은 교만이 자리 잡고 있다. 돈, 인기, 외모가 가장 값지다고 여기며 그 조건들을 갖고 있는 자신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심리다. 꿈을 이루면서 그 사람의 중심은 세속적인 기준위에 놓여있음이 판명난 것이다. 


나는 청소년기 때 늘 '성인이 되면'이라는 상상을 했다. '성인이 되면 돈도 벌고 통제가 줄어드니, 내 꿈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거야. 20살부터 시작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남들과 다른 성공을 거둘 거야.'라고 말이다. 내가 이러한 생각이 강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앞서 말했듯 꿈이 보상심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힘들었던 만큼 더 빨리 보상받고 싶었으며, 그래야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면 태어나 20년간 고통스러웠던 내 삶이 너무 억울하다고 여겼다. 무슨 직업으로 어떤 일을 할지도 정하지도 않은 채 그저 '성공'만을 바랬다. 그게 내 20대 초반의 모습이었다. 


그 결과 나는 극심한 강박에 점점 빠지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찾고 또 찾았다. 어떤 일로 정확히 나아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 해야 했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은 짧게 짧게 바뀌었다. 한 가지 일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면서도 '이게 맞나?'라는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해졌었다. 참 이상했다. 성인이 되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탄탄대로일 거라 여겼는데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빨리 사용하실 줄 알았는데 또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돈도 스펙도 없었다. 

그 당시 방에 혼자 있노라면 공황장애도 찾아왔다. 갑작스럽게 숨이 쉬기 힘들고 급격히 온 정신이 걷잡을 수 없이 초조해지곤 했다. 심호흡을 하며 여차저차 마음을 안정시킨 뒤면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나는 내가 꿈의 강박에 발목 잡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더 이상 빛의 꿈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붙잡던 순수했던 별 빛은 사라져 있었다. 그저 열등감에 불어온 세상적인 성공을 향한 갈망일 뿐이었다. 내 영혼이 어느 정도 병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 강박은 내 숨을 갖고 놀고 있었다.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을 느끼게 하며, 쉼을 빼앗은 노예로 만들어버렸다. 꿈은 곧 교묘한 비난을 일삼는 우상으로 뒤 바뀌어 있었다. 


'쉬어서 되겠어? 그렇게 게을러서 언제 성공할래?'

'너는 남들과 달리 특별해. 근데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 될 거야?'


이러한 생각들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지표를 만들지 못하면 잘못이라는 듯 나를 몰아세워 갔다. 나는 강박을 멈추고 꿈의 우상을 부수기로 결심했다. 다시 예수님께 초점을 맞췄다. 껍데기를 내려놓고 온전히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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