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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선 Mar 28. 2023

사라지는 것들의 가치, 상실의 시대

상실을 통해 배우는 삶의 책임감

어린시절 철 없던 생각으로 20살에 죽을 계획을 세워보곤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늙어가는 부모님의 얼굴 (자연의 흐름상) 앞선 순서인 부모님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줄지 두려웠다. 지극히도 이기적인 불효를 꿈꾼것이다. 그런데 살아보니 시간이 참 빠르게도 흘러가더라. 순식간에 20살이 되었고, 성큼 성큼 30대를 맞이했다. 나이를 먹어가며 생각보다 짧은 인생에 단명할 필요를 저버렸다. 물론  계획은 부모님의 울타리를 잃고 싶지 않던 어리광이었을 뿐이기도 했다.


나는 아주 가끔 이상한 질문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나는 어느정도의 슬픔을 느낄까.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면 나는 어떤 감정을 갖게 될까. 그때 찾아오는 상실감은 얼마나 큰 마음의 구멍을 만들어낼까?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상상만으로 파악할 수는 없었다.


대학교때 한 교수님이 눈물을 훔치며 강의실로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상태가 온전하지 못한 것에 양해를 구했다. 교수님은 강의 내내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으셨다. 그토록 슬퍼하는 교수님을 보면서 ‘가족 중 누가 세상을 떠나셨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통곡한 이유의 대상은 사람이 아니었다.


“우리집 반려견이 세상을 떠났단다. 나이가 들어 맞이한 죽음이지만 너무 슬퍼서...”


나는 교수님의 말에 속으로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동물의 죽음에 이토록 슬퍼할 수 있다니, 반려 동물은 가족과 같다는 말의 의미를 실제로 감상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상실은 늪과 같다. 늪지대를 감싸는 서늘하고 눅눅한 분위기가 두렵다. 그래서 가능한 오랫동안 상실감을 겪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상실감에 잠식당할 바에 죽음을 원했던 겁 많은 아이였다.

감정의 과도기를 지나는 청소년 시절이 되자, 그간 외면했던 상실이라는 감정을 파헤쳐 볼 용기가 솟았다. 내가 원한다고 직접 경험 할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설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정리되지 않았던 감정에 질서를 잡는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상실의 시대’라는 책이 주는 느낌은 매우 축축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손가락의 끝이 물에 젖은 듯 묵직하게 느껴졌다. 소설 속 주인공 ‘와타나베’는 절친한 친구(나가사와)의 죽음 뿐 아니라, 좋아하는 여자(나오코)의 꺼져가는 생명을 지켜보며 혼란을 겪는다. 그 속에서 주인공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방황을 맞이한다. 주인공은 점차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게 되면서 감정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제야 와타나베는 상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나는 이 책에서 상실이라는 표현이 어디에도 명확히 제시 되어 있지 않았던 점이 인상 깊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는 순간 찾아오는 공허와 해방감을 느낄때면, 상실감이 가슴 가득 차올라 있었음을 보게 된다. 원제목은 노르웨이의 숲인데, 한국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바꾼 편집자의 감각이 존경스럽다.




나오코는 17살에 죽은 나가사와와 연인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과 마음의 상처로 정신병원에 입원한 그녀를 와타나베는 주기적으로 찾아가곤 했다. 똑같은 상실을 겪은 두 인물은 끝내 대조되는 선택을 한다. 상실을 견디지 못한 나오코는 과거에 머물기를 선택한다. 그녀는 자신에게 다가올 미래를 차단하며 숨을 끊는다. 반면 와타나베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길 선택한다. 매여있던 상처에서 벗어나, 현재를 살기로 결심한다.



상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누구나 나오코처럼 과거에 잠식돼버릴 것이다. 우리는 낯선 변화를 달가워 하지 않는다. 그동안 적응해온 환경을 벗어나 애써 처음부터 다시 맞춰가기에는 수고로운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변화 중에 가장 큰 변화는 비어진다는 것이다. 바로 상실감이다. 한 순간 사라진 존재의 느낌이 달갑지 않다.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대상이 불현듯 사라져버린 순간, 혼란이 찾아온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아 과거를 추억해야 하는 일을 슬프다. 할 수만 있다면 원치 않는 상실감은 피하고만 싶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삶은 상실을 경험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인생이다.


상실의 감정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역시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날 때겠다. 아니 우리 삶에서 이별만큼 상실의 쓴 독주를 삼켜야 할 순간이 이 외에도 또 있을까? 절절한 이별의 아픔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안다. 이는 삶의 일부분이 송두리째 사라져 이전과 달라진 하루가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그 변화를 애써 외면하는 순간 혼란의 시간에 빠져버리고 만다. 문득 텅 비어진 내면을 본 순간 공허함과 씁쓸함이 가득 차 있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무엇인가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비워짐을 통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공간을 보게 된다. 상실은 사라져 버린 것들이 나의 마음에 얼마나 차지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그 자리가 가득 채워져 있을때는 잘 알지 못한다. 그 넓이와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상실을 맛보는 것은 달갑지 않다. 애써 익숙해진 습관을 지워야 하고, 비어진 공간에 새롭게 채워야 할 것을 찾아야 한다. 상실감도 상처처럼 새 살이 돋아날 수 있도록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텅 빈 구멍으로 무엇이 차오를지 알 수 없다. 변화된 현실을 부정한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뒤틀린 과거의 시간에 머물고자 한다면 현실의 방향 감각을 잊고 만다. 상실감은 허물어진 마음이 남긴 실패의 흔적이 아니다.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도기다. 상실감은 다음 발걸음을 옮기는 과정이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 시간, 나의 몫으로 남겨진 쓰디쓴 성장통이다. 상실을 통해 사라져가는 것들의 가치를 깨닫는다. 그렇게 소유한 삶의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나는 여전히 상실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어른이 되가고 있다. 그러면 언젠가 육체마저 상실되는 시간이 올 때 그 순간을 더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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