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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작가 Apr 22. 2024

반지하 단칸방에서 희망을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10]


'살아온 32년, 살아갈 32년'  시리즈는 중간에 쉬었다가 다시 이어가는 글이라 이전 글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간단하게 이야기해 드린다.


5편까지는 명퇴를 거부하고 팀장에서 부장 팀원으로 내려가서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6편부터 9편까지는 대학 시절과 직딩 초년의 삶을 말했는데, 주로 고난과 어려움이 스토리의 메인 주제였다. 내 잘못으로 전 재산 말아먹고, 회사 간부 승진 탈락하고, 어머님은 대장암에 걸리고… 끝없이 나에게 고난이 이어졌었다.




그 고난의 종착역은 반 지하 단칸방이었다.


번지차 (출처 : 늘푸르게 블로그)


위 사진 속 반지하가 실제로 늘작가가 살았던 곳이다. 작년(2023년) 가을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을 했었다. 이때 이야기를 블로그에 글을 만들어 올렸었다. 우리나라 주거공간 중 가장 열악한 환경 중 하나가 반지하 단칸방일 것이다.


참, 하나 알려드릴 새로운 사실(?)이 있다. 당시 전 재산을 정리하고 남은 돈이 마이너스 3천만 원으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랑 우연히 이 이야기했다가 맞아 죽을 뻔했다.  ㅋ


아내 "빚 다 정리하니 3천만 원 남았다고? 헐~~~ 당신 그때 총빚이 얼마였는 줄 알아?"  늘 ~ "1억 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아내 "헐,  1억 5천만 원 이상이었어. 그리고 설령 1억 원이라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빚 다 정리하면 3천만 원이 남아?" 늘~ ".... 전세가 5천5백만 원이었고, 우리가 모은 돈도 좀 있었고..."  아내 "그 전세금 내가 결혼하기 전에 모았던 돈 3천만 원에 당신이 회사에서 대출받아 빌린 돈 합한 거잖아? 당신은 결혼 전에 낑깡족으로 노느라 돈 하나도 모으지 않았고, 더구나  당신 집이 쫄딱 망해서 결혼식도 봄에서 가을로 연기했었잖아. 결혼할 때 비용도 당신 집에서 돈 빌려서 한 것이잖아. 그리고 우리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돈을 어떻게 모아."



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러면 그때 우리 빚 잔치 한 후 빚이 얼마 남아 있었어?"  아내 "최소한 1억 2~3천만 원 이상 빚이 남았었어. 대부분 카드회사 고금리 빚이라(당시 IMF 시절이라 금리 15% 시절이었다. ㅋ) 일단 금융기관 빚을 메꾸어야 했기에 당신이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돈 빌러 다녔잖아. 나는 첫 째 낳고 몸 푸느라 친정에 가 있었고.


당신이 집 정리하고 혼자서 반지하로 이사하고,  돈 빌리러 다니면서 온갖 서러움과 괄시당했었지. 그래도 그때 당신이 처절하게 돈 빌려서 막고 갚아 나가는 그런 모습 보면서 내가 당신 한번 더 믿어보자고 생각했었지. 아... 열받네. 옛날 생각 다시 나서." 늘 "미안. 정확하게 다시 기억할 게 빚잔치 끝나고 우리에게 빛 1억 3천만 원 남았었다고."  ㅋ  


당시 강남 은마 아파트 31평이 1억 5천만 원 하였던 시절이었다는 ~

1998년 서울 수도권 아파트 가격 (출처 : 모름)


이렇게 빛 청산 후 1억 3천만 원 빚을 안고  1800만 원짜리 포이동 반 지하 단칸방으로 옮겼다. 그래도 이 반지하는 RR이었다. 지대가 높아서 폭우에도 침수당할 위험은 없었고, 강남이고 당시에는 신축이라서. ㅋ


반 지하 집으로 이사를 간 후 아내는 첫 째 출산 직후라 산후조리를 위해 처갓집에 가 있었고, 나 혼자 그 집에 몇 개월 있었다. 당시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가 산후조리를 마치고 반 지하로 와서 나에게 “당신 내가 한번 더 믿어 볼 테니, 이 어려움 힘 합쳐서 잘 극복해 보자”라고 눈물 흘리면서 이야기한 아내의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맹세 했었다. “내 반드시 재기해서, 아내에게 진 빚을 꼭 갚겠다.” 내가 그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잘했던 잘하는 잘해야 할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잊으면 짐승이지 사람이겠는가?



Re Start


출발(출처 : 모름)


우리들은 돈 벌기 위해서(아내는 학생들 가르치는 프리랜서) 아이를 처갓집에 맡겨 놓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살아남아야 하였기 때문에 일에 올인을 했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때면 아내 앞에서 PT 연습을 한 기억도 난다. 다행히 이런 나의 노력으로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갔고, 고과도 잘 받아 급여도 오르고, 승진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년 정도 생활을 하다, 아이 케어를 위해 처갓댁 근처 동네로 이사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당시 혼자 살고 있었던 여동생과 합가를 하였었다. 돈이 없어서 다 쓰러져 가는 연립 1층으로 이사를 했었다. 전세금 4,000만 원 중 3,000만 원은 여동생이 우리는 1,000만 원 부담을 했었다. 그래도 25평이고 방도 3개라서 반지하 단칸방에 비하면 궁궐이었다. 다행히 여동생과 우리 부부는 서로 잘 맞아서 트러블 전혀 없이 잘 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희소식이 들렸다. 살고 있었던 썩다리 연립이 소규모 재건축이 되어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아내가 신박한 생각을 했다. “우리 집 사자”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았? 우리가 돈이 어디 있어?” 아내 “가능해. 강남 25평 오래된 아파트 전세 끼고 살 수 있어. 우리 4천만 원 전세금 생기니 아가씨에게 부탁해서 융통하고, 당신 회사 우리 사주 팔고, 생애 최초 주택구입 대출하면…” 늘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 아내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월세로 아가씨와 같이 살자. 우리 좀 고생하자.”


빌라 (출처 : SBS)


나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고 “그래 당신하고 싶은 데로 해. 여동생에겐 내가 부탁 좀 할게. 그리고 반지하 단칸방에도 살았는데, 두 칸이면 뭐 궁궐이네. ^^"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결정이 이때 아내 말 들은 것이다. 그렇게 당시 2억 2천만 원에 전세 1.2억이었던 강남 00동 주공아파트 25평을 1억 원 영끌해서 2002년에 등기 치게 되었다. (늘~퀴즈 : 지금 이 아파트 얼마할까요? ^^)   당시 이전 빚도 다 갚지 않았던 상태였지만, 두 명이서 죽으라고 돈 모으고 아껴서 살면 가능할 것 같아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쌀 한 톨 아끼면서 그렇게 살았다. 우리 아이들 옷은 전부 다 얻어서 입히고, 장난감도 전부 얻어서 키웠다. 서울에서 가장 싼 곳에서 사느라 회사까지 출퇴근 시간이 편도 1시간 30분 이상 걸렸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돈 모으고 빚을 갚아 나갔다.


하지만 그때 다시 반지하로 갔지만 이전과는 마음이 너무 달랐다. 반지하에 살아도 우리는 강남 아파트 주인이었으니까. 그때 여동생도 함께 살았는데, 이런 오빠 부부 모습을 보면서 너무 좋아하고 격려해 주었다. 만약 그때 여동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여동생에게 늘~감사하게 생각하고 지금도 서로 잘 지내고 있다. 참고로 여동생은 집이 두 채이다. :)


이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지프스 신화가 막을 내리고, 반지하에서 다시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


등불 (출처 : FreeP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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