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렇게 개인 파산, 직장 승진 실패, 모친 대장암 말기, 고향집 경매 등 남들은 평생 살면서 한 번도 겪기 쉽지 않은 상황을 수년에 걸쳐 겪게 되었다. 이런 늘작가 고난의 출발역이자 종착역은 반 지하 단칸방이었다.
번지차 (출처 : 늘푸르게 블로그)
위 사진 속 반지하 빌라가 실제로 늘작가가 살았던 곳이다.작년(2023년) 가을 25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을 했었다. 이때 이야기는 나의 개인 블로그에 글을 올렸었다.
나는 그동안 그때 전 재산을 정리하고 남은 돈이 마이너스 3천만 원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아내와 우연히 이 이야기했다가 맞아 죽을 뻔했다. ㅋ "당신 뭐라고? 빚 다 정리하니 3천만 원 남았다고? 헐~~~ 그때 빚이 얼마였는 줄 알아?", "1억 원 정도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내가 대답을 하자 "내 기억으로는 빚이 1억 5천만 원 이상이었어. 설령 1억이라고 해도 그 빚 다 정리하면 어떻게 3천만 원이 남아?"
아내가 조목조목 당시 상황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 신혼 전셋집이었던 양재동 18평 빌라 5천5백만 원 중 3천만 원은 내가 결혼 전에 모아놓았던 돈이었고, 나머지 2천5백만 원은 당신이 대출받았던 것이었잖아? 그리고 우리가 결혼할 때 당신 집이 다 망해서 결혼식도 봄에서 가을로 연기했었고, 결혼할 때 비용도 돈 빌려서 한 것이었잖아? 그리고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돈을 어떻게 모았겠어?
나는 그제야 당시 상황이 기억이 났었다. "그러면 그때 우리 빛이 얼마 남아 있었어?" , "최소한 1억 2~3천만 원 이상 빚이 남았었어. 대부분 카드회사 고금리 빚이었잖아? 당시 IMF 시절이라 금리 15% 시절), 당신이 부모형제, 친구들에게 돈 빌러 다녔잖아? 나는 첫 째 낳고 몸 푸느라 친정에 가 있었고"
"그때 당신 혼자서 전세 집 정리하고 반지하로 이사하고, 돈 빌리러 다니면서 온갖 서러움과 괄시당했었지. 그래도 처절하게 돈 빌려서 막고 열심히 빚 갚아 나가는 그런 모습 보면서 내가 한번 더 믿어보자고 생각했었지. 아... 열받네. 옛날 생각 다시 나서."
이렇게 아내가 나에게 이야기를 하니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이제는 정확하게 다시 기억한다. 빚잔치 끝나고 우리에게 빛 1억 2천~ 3천만 원 남았었다고. 이 금액이 지금도 큰 금액이지만 당시에는 어마 어마한 돈이었다. 당시 강남 은마 아파트 31평이 1억 5천만 원 하였던 시절이었다.
1998년 서울 수도권 아파트 가격 (출처 : 모름)
이렇게 1억 2~3천만 원 빚을 안고 다시 1800만 원 대출을 받아서 포이동 반 지하 단칸방으로 옮겼다. 그래도 이 반지하는 RR이었다. 지대가 높아서 폭우에도 침수당할 위험은 없었고, 강남이었고 당시에는 신축이었다
반 지하 집으로 이사를 간 후 아내는 첫 째 출산 직후라 산후조리를 위해 처갓집에 가 있었고, 나 혼자 그 집에 몇 개월 있었다. 당시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내가 산후조리를 마치고 혼자 살고 있었던 반 지하로 와서 나에게 “당신 내가 한번 더 믿어 볼 테니, 이 어려움 힘 합쳐서 잘 극복해 보자”라고 눈물 흘리면서 이야기한 아내의 눈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때 맹세 했었다. “내 반드시 재기해서, 아내에게 진 빚을 꼭 갚겠다.” 내가 그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죽을 때까지 아내에게 잘했던 잘하는 잘해야 할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만약 이것을 잊으면 짐승이지 사람이겠는가?
Re Start
출발(출처 : 모름)
우리들은 돈 벌기 위해서(아내는 학생들 가르치는 프리랜서) 아이를 처갓집에 맡겨 놓고 주말에만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나는 회사에서 인정받고 살아남아야 하였기 때문에 일에 올인을 했었다.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 있을 때면 아내 앞에서 PT 연습을 한 기억도 난다. 다행히 이런 나의 노력으로 회사에서 인정을 받아갔고, 고과도 잘 받아 급여도 오르고, 승진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1년 정도 생활을 하다, 아이 케어를 위해 처갓댁 근처 동네로 이사 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런데 돈이 없어서 궁여지책으로 당시 혼자 살고 있었던 여동생과 합가를 하였었다. 돈이 없어서 다 쓰러져 가는 연립 1층으로 이사를 했었다. 전세금 4,000만 원 중 3,000만 원은 여동생이 우리는 1,000만 원 부담을 했었다. 그래도 25평이고 방도 3개라서 반지하 단칸방에 비하면 궁궐이었다. 다행히 여동생과 우리 부부는 서로 잘 맞아서 트러블 전혀 없이 잘 살았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는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데, 희소식이 들렸다. 살고 있었던 썩다리 연립이 소규모 재건축이 되어 이주를 하게 되었다.
이때 아내가 신박한 생각을 했다. “우리 집 사자” 나는 그 말을 듣고 “돌았? 우리가 돈이 어디 있어?”, “가능해. 강남 25평 오래된 아파트 전세 끼고 살 수 있어. 우리에게 4천만 원 전세금 생기니 아가씨에게 부탁해서 융통하고, 당신 회사 우리 사주 팔고, 생애 최초 주택구입 대출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 이렇게 이야기를 하자 아내는 “방 두 칸짜리 반지하 월세로 아가씨와 같이 살자. 우리 좀 고생하자.”
빌라 (출처 : SBS)
나는 더 이상 고집 피우지 않고 “그래 당신하고 싶은 데로 해. 여동생에겐 내가 부탁 좀 할게. 그리고 반지하 단칸방에도 살았는데, 두 칸이면 뭐 궁궐이네. ^^"
내 인생에서 제일 잘한 결정이 이때 아내 말 들은 것이다. 그렇게 당시 2억 2천만 원에 전세 1.2억이었던 강남 00동 주공아파트 25평을 1억 원 영끌해서 2002년에 등기 치게 되었다. 당시 빚도 다 갚지 않았던 상태였지만, 두 명이서 죽으라고 돈 모으고 아껴서 살면 가능할 것 같아서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 옷과 장난감 전부 얻어서 키웠다. 서울에서 가장 싼 곳에서 사느라 회사까지 출퇴근 시간이 편도 1시간 30~40분 이상 걸렸었다. 우리들은 그렇게 이를 악물고 돈 모으고 빚을 갚아 나갔다.
하지만 그때 다시 반지하로 갔지만 이전과는 마음이 너무 달랐다. 반지하에 살아도 우리는 강남 아파트 주인이었으니까. 함께 살았던 여동생은 이런 오빠 부부 모습을 보면서 좋아하고 격려해 주었다. 만약 그때 여동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여동생에게 늘~감사하게 생각하고 지금도 서로 잘 지내고 있다. 참고로 여동생은 집이 두 채이다. :)
늘~NOTE
타고난 금수저가 아니면, 집은 내 돈 100%로 절대 마련하지 못한다. 자금이 좀 있는 사람들은 대출받아서 실거주하면 되겠지만 그런 돈도 없는 사람들이 집을 살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부부가 한 방법이 베스트이다. 거주와 소유를 분리하는 것이다. 일단 전세 끼고 집을 사 둔 후 본인들의 살 곳은 등기 친 곳보다 싸고 열악한 다른 아파트나 주택에서 거주하는 것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지 못하면 그곳보다 훨씬 싼 동네,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면서 전세금 모으고 들어 갈 때 그 집 대출을 받으면 된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도 이 방법이 유효하다.
그런데 요즘 후배들을 보면 이런 삶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얼죽신'이라는 단어까지 나왔을까? 비싼 동네의 썩다리 아파트/연립/빌라에서 사는 것보다, 신도시나 인근 신규 택지개발지구 신축 아파트에서 살려고 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데 이것 아는가? 이런 좋은 아파트에서 살게 되면 서울이나 대도시 핵심권 아파트에서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혹자는 대한민국 부동산은 끝났다. 인구 급감하고 경제성장 둔화하는데 집 값이 오르겠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예전처럼 우리나라 전 지역 부동산이 다 오르지는 않겠지만 서울과 수도권 핵심지 부동산은 계속 오를 것이다.
대장암 말기이셨던 어머니도 서울 최고병원에서 유명한 전문의에게 수술을 받고, 6개월 사신다고 하셨던 분이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고 계신다. 이렇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지프스 신화가 막을 내리고, 반지하에 다시 희망의 등불이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