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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san민산 Nov 15. 2022

불행이 닥치지 않은 기적

30년 넘은 무사고 운전자 남편이 아파트 주차장에서 접촉사고를 냈다. 후방 주차를 하다가 옆에 주차되어있는 차를 보지 못하고 범퍼를 살짝 긁은 사고였다. 


내려서 확인해보니 그 차의 범퍼는 이미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한가득이었고 방금 남편이 스친 자국은 손가락 길이 정도의 스크래치가 남아있었다. 워낙 여기저기 손상이 심한 범퍼라서 지금 긁힌 부분을 확인하기 위해 차주에게 연락하고 이웃 주민을 만났다.


남편은 일정 금액을 드릴 테니 이 부분을 지우시던가 아니면 가까운 정비소에서 자국을 지워주겠다고 했다. 아주 가벼운 접촉이어서 그 정도로 끝날 줄 알았지.


그분은 보험처리를 요구했고 보험회사 직원은 안타깝지만 당사자가 요구하면 범퍼는 부분 수리가 되지 않아서 전체 교체를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결국 범퍼를 통째로 교체하고 수리 기간 동안 렌트비까지 처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은 며칠을 끙끙 앓았다.

그동안 누가 남편 차를 긁고 도망가 버린 적은 있어도 지금까지 미미한 접촉사고 한번 없었던 남편은 게다가 같은 동에 사는 이웃 주민에게 많이 속상해하고 있었다.


지난 주말 남편과 산책 중이었다.


"연락하지 말걸 그랬나 봐. 어디가 긁혔는지도 몰랐을 텐데.." 남편은 아직도 속상함이 남아있었다.

"속상하지만 연락하는 게 맞는 거야. 잘했어."


"아, 왜 이렇게 재수가 없냐... 되는 일도 없고 누구는 가만히 앉아서 범퍼도 새 걸로 바꾸고 재수도 좋구먼..."

"그날 그 사람은 재수가 좋았던 거고 당신은 재수가 안 좋았나 봐. 그냥 그거뿐이야. 사실 그 사람도 잘못한 건 없는데 당신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테니까."


요즘 하는 일이 힘들어서 안 그래도 마음이 편치 못했는데 그 일로 자신의 불운을 탓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행운의 기적을 바라면서 로또를 사잖아. 당첨된 사람들을 부러워하면서. 

우리는 '로또 되게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실망하는데,

사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은 더 많은 기적들 속에서 기적인 줄 모르는 채로 살아가고 있는 거래.

번개 맞지 않게 해 주세요, 내 머리 위로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우리는 한 적이 없는데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지."


"그렇기도 하네. 그래, 아이들 잘 자라 준거도 감사하고 지금 일할만큼 건강한 것도 감사하지."


아마도 이웃 주민의 '잘못'이 아니라 그분에 대한 '얄미움' '섭섭함' 이런 원초적 감정들을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어서  그 속상함을 덜어낼 계기가 필요했던 듯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 산책 이후로 남편의 속상함은 많이 가라앉았다. 


그저 행운의 기적은 덤이고 불행이 닥치지 않은 기적을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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