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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FT explorer 허마일 Mar 03. 2020

태권도로 맛 본 쓴 맛.

짧지만 강렬했던 태권도 이야기 #1  

 아빠 키 163cm, 엄마 키 151cm 두 사람의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그 아담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또래 아이들보다 심히 작은 체구로 자랐다. 가뜩이나 작은 키에 생일이 2월 초, 빠른 년 생이라 일곱 살에 학교에 가야 했는데, 부모님은 입학식 날 남들 배꼽 즈음 솟은 나의 정수리를 보고는 입학을 포기할까 망설였다 한다. 학교에 간다며 며칠째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들의 행복을 빼앗을 순 없었다고 말하지만, 맞벌이하는 두 분에겐 어린이집도 안 가는 내가 어지간히 신경 쓰였을 터였다.


 양팔 간격 좌우로 나란히! 헤쳐모여! 자, 여러분은 이제 우리 학교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옆 사람 손을 잡아주세요. 양팔을 위로 쭉 뻗어 친구들의 손을 잡고 마냥생글벙글 하는 천진난만함. 여보. 쟤 좀 봐. 좋단다. 신났네. 그렇게 1학년이 되었다.


 첫 자리배정 시간에 한 여자애와 짝꿍이 되었다. 역시나 옳다구나 그녀에게 한눈에 반했다. 사랑이는 얼굴이 하얀 반죽처럼 동그랗고 통통하지, 입술은 조그맣고 빨간 게, 꼭 어젯밤 우유에 라면을 말아먹어 탱탱 부어버린 백설공주 같았다. 얼굴을 찡그렸던 건 눈부셔서 그랬던 거야. 하하…


안녕?

응.

숙제했어?

응.

아…이 크레파스 써볼래?

아니.

그.. 그래…(날아라 슈퍼보드 에디션을 거절하다니…내가 그렇게나 싫은 거야…?)


 3월, 새 학기의 설렘과 함께 봄이 기지개를 피고 있는 마당인데 왜 이렇게 추운걸까. 백설공주와 함께 했던 한 달은(달마다 짝꿍이 바뀌었다.) 혹독한 겨울이었다. 사랑의 새로운 짝꿍 유준은 그녀보다 키도 크고 듬직했다. 급격하게 친해진 그 둘은 크레파스와 색연필을 같이 쓰는 사이가 되었다. 하…그녀보다 훨씬 작았던 나는, 누가 봐도 백설공주의 왕자님이 아니라 난쟁이로 보였겠지, 그것도 일곱 번째 막내… 마음을 접어야 한다. 하지만 남자의 순정이 그리 쉽던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랑이를 짝사랑하는 어둡고 추운 시간이 지속되었다. 후… 의기소침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야 너 3학년 맞아? 완전 땅꼬마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면, 빛을 가리는 그들의 큼직한 실루엣과 하늘에서 내리 꽂는 시선에 주눅이 들 수밖에. 아들이 겁 많고 소심한 아이로 자라는 게 걱정된 아빠는 갑자기 태권도 학원에 등록시켰다. ‘강해지거라. 너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는 힘을 길러야 해. 진정한 강함은 약한 이들을 돕는 것에 있단다.’ 따위의 가슴뛰는 멘트는 없었지만, 이제는 손오공보다 격투 액션 스타 이연걸과 성룡을 좋아했던 당시 열 살이 그렇듯 무술을 동경했기에 내 가슴은 벅찼다. 그래. 키는 작지만 강하고 멋있는 남자가 되는 거야. 흠, 아직 술을 못하니 취권은 못 배우겠어… 아쉽지만 무영각(황비홍(이연걸)의 현란한 발차기 기술)부터 완마하자! 아다다다!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게 될 테니까!


 태권도 학원에서 만난 관장님은 분명 TV 속의 수염 난 늙은 고수와 다른 느낌이었지만 쩌렁쩌렁한 카리스마와 화려한 발차기에 금세 매료되었다. 이 사람이라면 내 스승으로 더할 나위 없겠군.

 엄마는 혹여나 내가 키가 자랄 쓸데없는 걱정에 한참 큰 사이즈로 도복을 마련했다. 너무 커서 팔다리를 두 번씩 접어야 했지만, 날아갈 듯이 좋았다. 흰 도복을 입는 것만으로 발끝에서 올라오는 기운! 팔을 휘저으며 몸 안에 돌고 도는 장풍을 잠재우고 흰 띠를 질끈 묶는다. 전설의 시작. 아버지 어머니. 강해지겠습니다. 자칭 축지법이라는 뜀박질로 학원을 향해 달렸다.


 도장에 도착했더니 뚜 둥! 도복을 입고 있는 사랑이가 있었다. 2년 만이었다. 무려 초록 띠를 매고 있는 그녀는 키가 더 자라서 팔다리도 길쭉길쭉했다. 통통했던 볼살도 전보다 사라지고 피부도 전처럼 하얗지 않았다. 둥그런 선이 날렵해진 감은 있지만 백설공주의 모습은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어쩌지? 인사해야 하나? 그냥 모른 척 할까? 소심쟁이는 결국 아는 채 하지 못했고 그녀 역시 나를 몰라본 탓인지 외면하는 것인지 인사는커녕 눈길도 주지 않았다. 춥다… 또 겨울이 온 거냐.


 합! 어이! 얍!  

 쫙쫙 찢어지는 유연한 학다리, 그녀는 관장님에게도 오랫동안 이쁨받는 수제자임이 분명했다. 이제는 짝사랑이 아닌 경쟁의 대상이 되어버린 그녀. 분발해야 한다. 영화에서 본 건 많았던 나는 매일 수업 30분 전에 미리 도장에 가 매트리스가 깔린 넓은 바닥에 빗자루질했다.(엄마가 봤다면 까무러쳤을 듯…) 관장님이 있는 사무실 앞을 들락거리며 그의 시야에서 알짱거렸다. 빗자루질이 끝나면 온갖 기합을 내지르며 전날 배운 품새를 펼쳤다.


오 재석이 일찍 와서 뭐 하는거야?

헉!? 관장님 계신지 몰랐어요. 아. 품세 연습하고 있었어요.

이야~ 완전 열심히네. 형들보다 훨씬 빨리 배우겠어.

아이 아니에요.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미래의 황비홍을 미쳐 날뛰게 만드는 법. 공부가 가장 싫었던 나는 정말로 태권도를 열정적으로 한 탓에 같은 레벨의 아이들보다 품새 진도가 월등히 빨랐다.

 드디어 학부모와 친구들을 초대하는 승급 심사 날이 코앞에 왔다. 승급 심사는 품새 파트와 겨루기 파트, 두 파트로 이루어지는데 품새에서 이미 흰 띠의 레벨이 아니었던 나는 초록 띠 선배들과 함께 태극 2장, 3장도 함께 선보일 예정이었다. 겨루기도 자신 있었다. 나에겐 길고 긴 학다리와 쭉쭉 찢어지는 유연함은 없었지만 짧고 빠름의 장점을 살린 번개발이 있었기에…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나의 필살기 무영각(처럼 보이는 나래차기(점프해서 양발 앞 차기로 짧고 빠르게 상대방 배를 탕탕! 가격하는 기술))을 보면 다들 까무러치겠지?


 심사를 일주일 즈음 앞두고 관장님이 각자의 겨루기 상대를 지목해주었다. 그런데 나와 붙을 상대가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 네!? 제가 쟤랑요?! 함께 있던 아이들이 남자가 여자랑 겨루기한다고 히죽거렸다. 하지만 사랑이는 학원의 암묵적인 에이스였고 누구보다 강한 피지컬과 기술을 겸비한, 초록 띠 중에서도 농도가 짙은 거무튀튀 한 초록 띠였다. 이것은 관장님의 시험이었을까? 내 맹랑한 번개발에 대한 기대였을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뭐든 상관없었다. 기회였다. 내가 이 태권도장의 눈부신 에이스가 될 기회!

 후후. 생각보다 빨리 올 것이 왔군. 미처 몰랐지만, 계획대로 되고 있어! 사랑아. 엉엉 울고 있을 너를 생각하면 마음이 좋지 않지만, 강호의 세계는 냉정한 법! 너무 아프진 않을 거야.


 그날 오후, 몸을 풀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용기내어 말을 걸었다.

우리 살살하자.

뭔 소리야? 심사인데 열심히 해야지.

아니…나는 너 다칠까 봐......

니 걱정이나 해.

그…그래…


 승급 심사 날이 밝았다. 부모님, 외삼촌과 당시 여자친구(지금의 외숙모), 같이 어울리는 친구 몇 놈들까지. 도장에는 태권 용사들에게 응원과 격려를 해주기 위한 가족과 친구들로 북적거렸다. 꽃다발도 몇 덩이 있었던 거 같다. 기대와 설렘으로 전날 잠을 제대로 못 잤지만 몸도 가볍고 컨디션도 나쁘지 않았다. 다만 많은 관중이 자리한 축제 비슷한 승급 심사 행사 분위기가 처음이라 그랬는지. 심장이 아플 정도로 나대서 신경이 쓰였다. 침착하자. 심호흡을! 난 할 수 있어.


 흰 띠들의 태극 1장 품새 심사. 나도 이 대열에 껴서 능숙하게 심사를 맞췄다.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매일 연습했던 품새였다. 심호흡과 함께 단전으로 끌어올리는 집중력! 리듬과 함께 절도 있는 동작에 몸을 맡기니 심장도 다시 정신줄을 잡기 시작했다.

 초록 띠들의 품새 심사에 나는 또 출정했다. 저어~기 흰 띠가 내 조카예요. 근데 잘 안 보이네. 하…왜 이렇게 쪼끄매…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삼촌 목소리가 들리고. 허재석! 화이팅! 아빠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각 잡힌 오와 열을 만든 초록의 군단, 앞줄 두 번째 열에 낀 흰 띠는 드넓은 초원에 춤추는 한 마리 백조이리라. 기대와 달리 현실은 옥수수밭 속 길 잃은 흰둥이…잘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눈에 띄기 위한 오버액션. 기합도 동작도 과했다. 으~아!! 허어업!! 어이어이!! 으라차차!! 누가 태권도를 방어의 무도라 하였는가. 나에게 태권도는 화려함과 인기, 권력의 무예일 뿐.


너 형들이랑 키 차이 많이 나서 사진이 잘 나왔을지 모르겠네.

뭐야… 삼촌이 못 찍고 왜 내 탓 해? 됐고, 겨루기하는 건 제대로 찍어줘.


 성별도 체급도 다른 스페셜한 미스매치가 시작하려 하자 관중들은 열성적으로 환호했다. 나와 겨루기 상대인 사랑이가 마주 섰다. 아니…뭐지? 이 위압감은…? 초록 띠를 질끈 묶고 머리와 배에 보호대를 찬 그녀는 며칠 사이 키가 더 큰 건지. 두 발로 우뚝 서서 그윽이 먹이를 바라보는 곰 같았다. 흐미… 나도 모르게 그 눈빛을 피했다. 생존의 위협을 감지하는 편도체의 반응일까? 미세하게 손발이 떨리고 심장이 아까보다 더 요동친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내 발은 쟤 눈보다 빠르니까…

 자, 둘 다 차렷! 인사!

관장님의 우렁찬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겨루기! 시~작!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큼직한 배때지에 내 무영각을 박아주지. 나는 절대 여자라고 봐주지 않아!… 그리고 넌 내 크레파스를 거절했어!!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좁히다 곧장 날아올랐다. 번개 발차기를 시전하려는 순간! 그녀는 오히려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와 내 발이 뻗칠 공간을 삼켜버렸다. 그러고는 곧장 왼팔로 공중에 뜬 내 하체를 뒤에서 감고 오른손으로 어깨를 힘차게 밀어 휘리릭! 쿵! 내 몸뚱이를 매트 위로 내동댕이쳤다. 아니 이거 유도아니여…? 뭐 이따위 기술을…

 곰 앞에 깔짝거리던 한 마리 벌. 그 묵직한 후려침 한 방에 바닥에 나자빠진 벌. 번개 믿고 까불다 벼락 맞은 벌. 멋 모르는 벌이 제대로 벌 받는 순간이었다. 매트에 자빠진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 속에 서린 패닉을 읽은 모양인지. 사랑의 입꼬리가 살짝 실룩거렸다. 이름처럼 러블리 했으면 좋으련만…

 보는 눈이 많았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을 터. 나는 이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어떻게든 바꿔야만 했다. ‘재석아… 일어나라…!! 아비가 여기 있다!!’같은 아빠의 목소리는 없었지만, 관중들의 박수 소리에 힘입어 일어나는 것은 나름 극적인 연출. 나는 멀쩡하다는 듯이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서 앞을 보는 그 순간… 내 머리 위에 있는 사랑의 곰 발바닥…! 꽝!

 잘 빠진 다리로 화려하게 날린, 뒤 후려차기. 아름답고 우아한 학의 비상. 태양태권도(실제 도장 이름) 겨루기 역사에 한 자리를 차지할 명장면. 내 머리통에 정확하게 꽂히는 순간이었다. 아 제발…일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나가떨어지냐고…


그땐 말이야. 눈을 감고 있는데도 정말 반짝반짝 별이 보였지. 만화에서 나오는 거 봤지? 그거 뻥 아니고 진짜라니까?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고. 여기 만져봐 봐. 뒤통수가 살짝 찌그러졌잖아? 대단해.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어…


언젠가 나는 뼈아픈 고통과 맞바꾼 자랑스러운 경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해야 하는 걸까?


 아파서 울었다. 분하고 억울해서 울었다. 머리를 쥐어 잡고 꺼이꺼이 울었다. 다들 어쩔 줄 몰라 했다. 괜찮아. 괜찮아. 부모님들이 계셔서 그런지 갑자기 친절해진 관장님… 뭐가 괜찮아요?! 쟤 때문에 다 망쳤다고요! 황비홍도 성룡도 다 싫어! 라는 말을 눈물로 삼키며 훌쩍였다. 사랑이는 미안했는지 살기가 빠진 눈으로 이도 저도 못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뻘게진 눈으로 나는 노란띠와 상장을 받았다. 재석아 웃어야지~ 아직도 눈물이 맺혔지만, 삼촌의 카메라 앞에선 활짝 웃었다.

에게게! 울다가 웃으면 똥구멍에 털 나는데. 얼레리 꼴레리~ 허재석이는~ 똥구멍에~ 털 났대요

아! 하지 말라고!!

나는 또 울면서 삼촌에게 마구 무영각을 날렸다. 제대로 깨달았다. 정통으로 발차기를 맞은 삼촌이 분명 윽 소리를 내며 쓰러져야 하는데 삼촌은 나를 놀리며 좋아 죽었다. 진정한 재야의 고수였다니…


 적잖은 충격과 쓸쓸한 마음이 컸지만, 가족, 친구들과 함께 짜장면과 탕수육! 이건 맛있어도 너무나 심하게 맛있는 것. 당시 최고의 외식으로 손꼽히던 음식을 먹기로 했기에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야, 키 차이를 봐라. 너무했지. 그게 사람이냐? 곰이지?

그래. 조금만 지나 보렴. 우리 재석이가 금방 힘도 세지고 키도 클 거야.


 위로해주는 친구들과 엄마와 달리 아빠는 말없이 고량주를 홀짝이고 있었으니 아들의 나약함이 조금 씁쓸했나 보다. 아니 어쩌면 키 작은 남자의 한이 아빠에게도 박혀 있는지 모른다. 그 아픔을 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죄책감일 지도 모른다. 아빠의 고량주는 무척이나 써 보였다.

 아빠를 흘깃 보고 먹은 탕수육은 씁쓸했다. 이 쓴 고기를 질겅질겅 씹어내며 아쉬운 오늘을 되새김질해 본다. 내가 눈물 젖은 노란 띠가 되었을 때 그녀는 찬란한 파랑 띠가 되었다.

키 차이만큼이나 좁혀지지 않는 격차. 타고난 피지컬과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조건. 사랑도, 무술도, 성공도… 열 살인 나에게 노오력해도 안돼는 이 뭣 같은 세상은 그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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