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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지 Oct 23. 2020

자, 이제 회복의 시대로

이것은 자기 암시 글입니다

운전면허 시험에서 또 떨어졌다. 도로주행도 아닌 기능검정시험에서. 이번에는 주차 계산식에서 오류가 났는지 T자 주차 구간 안에서 차선을 이탈했다. 나오면서는 중앙선을 밟아재꼈다. 난 어딜 밟았는지도 몰랐는데 안전요원에 의해 실려 나오면서 들었다. 두 번 차선을 이탈해 점수 미달 불합격. 멍하고 믿기지가 않았다. "저번에도 이랬는데..." 안전요원에게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시험 접수하고 가라는 안전요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학원 사무실 앞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또 떨어졌어..." 아까보다는 또렷하지만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저번처럼 곧장 재시험 접수는 하지 않기로. 수업료만 80만 원이 넘는데 접수비 5만 5천 원(×2)까지 더하면 어마 무시한 돈이다. 카드 긁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학원을 나와서 걷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자괴감이 들었다. 시험에 떨어져서도 있지만 돈 때문도 있다. 지금 포기하기에는 이미 들은 수업(료)이 아깝고, 어쨌든 운전면허는 꼭 따야겠는데 돈이 자꾸 드니까 말이다. 오늘 시험에 떨어져서 또 5만 5천 원이 나가고, 혹시나 수업을 더 듣는다면 10만 원 넘게 지출될 미래가 눈물겨웠다. (참고로 난 지독한 짠순이다. 예전에 8만 원짜리 비행기표를 날리고 50만 원을 더 쓰게 됐을 때 얼마나 대성통곡했는지.)


돈 때문 말고도 우울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내가 이렇게 감이 없고 멍청한가. 다른 하나는 남들은 잘하는데 왜 난 못하는가. 둘 다 주관적인 내 생각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내가 정말 공간지각 능력이 부족한 걸 수도 있고, 연습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고, 학원 수업이 개똥 같아서일 수도 있다. 원생 예약을 꾸역꾸역 받는 학원에서 실전 연습을 하기는 어려웠다. 장내에 차들이 밀려있어 길 한가운데 멈추고 시간 초과되기 일쑤였다. 코너링 감을 못 잡는 내게 강사는 별다른 조언을 해주지 않았다. 그니까 내 탓만이 아니라 부조리한 상황 탓도 있다는 뜻.


두 번째 경우도 그냥 내뇌비교라는 걸 안다. 첫 탈락을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나 지금 너를 경멸했어"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기능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많다. 오늘 내가 본 시험 시간에만 여럿이 이래저래 실격당하고 불합격했다. 인터넷에 찾아봐도 세 번 다섯 번 떨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그니까 나의 기준에 내가 들어차지 않아서 아쉽고 슬픈 마음이다. 알아도 슬픈 걸 어떡해?


낮에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시험 시뮬레이터를 하러 갔다. 방금 시험 본 감대로 연습 한번 해보려 했으나,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한 시간은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학원 시험 접수비는 국가 시험장에서 보는 것보다 두세 배 비쌌다. 아니 수업료도 비싸게 받으면서 왜 시험비까지? 어이없고 화가 나면서도 희망이 생겼다. 학원 시험 메리트는 연습한 코스에서 본다는 건데, 나는 별 도움이 안 됐으니 굳이 학원에서 안 봐도 되겠다 싶었다. 학원비를 환불받을 거다. 기능시험은 시뮬레이터로 연습하고 도로주행은 엄마 도움을 받아야지. 도로주행 수업 6 시간도 별 기대가 안되니까.


시뮬레이터에서도 차선을 숱하게 밟았다. 그래도 돈 아낄 생각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자주 연습하러 와야 할 것 같다. 천천히 돈 적게 들면서 독학으로 면허를 딸 수 있을까? 이미 지출한 돈은 어쩔 수 없다. 장내 기능 코스 연습해본 값이 비쌌다.


오늘의 교훈은 한 길로만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주변에서 하는 대로 학원에 등록해 시험에 떨어지고 비싼 재시험까지 봤지만 또 실패했다. 다시 시험 볼 엄두가 안 났다. 잠깐 멈춰서 고개를 돌리니 다른 방법도 있었다. 더 나아 보이는 방법이. 미리 알았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후회는 소용없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안 되는 길로 계속 가지 말고 돌아가 보자.


제레미 리프킨은 팬데믹 이후 우리는 '성장의 시대'가 아닌 '회복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MBC '100분 토론' 스크린에 둥둥 떠서 했던 말이다. 스크린 밑에는 기본소득(이라 말하고 지역화폐라 읽는) 논쟁을 하는 이재명 지사와 원희룡 지사가 있었다. 리프킨은 거시적인 담론만 말하고, 두 지자체장은 지엽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했다. 토론이 끝나고 리프킨의 두리뭉실한 제언만 머리에 맴돌았다.


근현대를 이끌어온 일방향적 성장 문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앞으로는 위기에 취약한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복원할지가 더 중요하다. 회복의 시대가 어서 도래하면 좋겠다. 경쟁과 발전을 강조하는 사회에서는 슬픈 마음이 먼저 든다. 내 자질을 탓하고 남들과 비교하게 되니까. 무기력하고 고통받는 와중에도 꾸역꾸역 삶을 밀고 나가야 한다.


나는 청년을 지칭하기에 '존버세대'가 가장 적절하지 않나 생각한다. 욜로는 허상이다. 밀레니얼과 Z세대는 겉으로는 자유분방하고 플렉스를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들 입시에서, 수강신청에서, 취업에서, 공무원 시험에서, 주식에서, 일터에서 존나게들 버티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북유럽인들은 고통 속에서 존나게 버틸 이유가 없다. 인구 밀도가 낮고 도란도란 평등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의 11%를 차지하는 수도권에만 5천만 인구의 절반이 산다. 앞만 바라보며 존버하는 내 옆에 다른 사람도 존버하고 있다. 누군가 존버해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면 좀만 더 버텨야지 생각한다. 낙오되는 사람을 보고 저렇게 안 돼야지 다짐한다. 서로를 쳐다보고 평가하느라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어렵다.


빽빽한 차선에서 이탈하면 체제의 모순이 보인다. 모순을 알면서도 존버하는 현실이다. 회복의 시대로 나아가며, 이 병목구간 말고 다른 길은 없나 둘러볼 필요가 있다. 시험에 떨어지는 나 자신을 탓하기에도, 남들을 시기하기에도 내 청춘은 아깝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한 길만 고집하는 건 내 손해 아닌가? 깨지기 쉬운 미래를 가졌다. 회복력은 존버가 아니다. 기대 말고, 비교 말고 회복력을 기르자. 비단 운전면허 얘기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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