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여든다섯 번째
"오늘은 뭐 먹으러 갈까?"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더위가 떨어지지 않는 옥탑방에서 창문을 열고 날 바라보며 그 사람이 내게 물었다. 그때 우리는 가난했었고 사랑도 했었고 그래서 없는 돈을 모아 옥탑방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어도 열기가 가시지 않아 그 사람은 옥상에 있는 수도꼭지에 긴 호스를 연결해서 옥탑벽과 지붕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너무도 얇은 벽이었다. 겨울에는 둘이 안고 견딜 수 있었지만 여름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시원한 건물에 가서 낮을 보내거나 은행 창구에 가서 앉아있곤 했다
우리는 나름 꿈을 가지고 있어서 대부분의 월급을 저금을 했다. 생활비를 최대한 아껴야 했다. 특히 식비를. 회사나 집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회식이 있으면 거절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한 월세를 얻었고 옷은 얻어 입거나 동묘에 가서 사곤 했다. 그렇게 하고 나머지는 저금을 했다. 나는 그런 걸 잘하지 못해서 내가 버는 돈은 생활비로, 그 사람이 버는 돈은 월세를 내고 저금을 하게 되었다. 빨리 돈을 모으면 빨리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는 무리하게 아끼고 살았다.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외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월급날 이후 돌아오는 첫 토요일에는 외식을 하러 나갔다. 부대찌개, 닭갈비 같은 저렴한 음식들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외식이라고 하기도 하찮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한 달에 한번 있는 외식은 꿈꾸는 미래와 합쳐져서 아름다운 기다림이 되었다
너무 더운 날이었다. 축 쳐져 있던 나는 메밀국수가 먹고 싶었다. 차가운 메밀국수. 아니면 소바 같은. 그 사람은 찬 음식은 좋아하지 않았다. 여름일수록 팔팔 끓여 나오지 않으면 의심을 했다. 우리는 주변에 뭐가 있나 고민하다가 국숫집이 있었음을 기억했다. 맞다. 그곳에 메밀국수도 있었던 것 같다. 서둘러 옷을 입고 나왔다.
그날의 태양은 너무도 뜨거웠다. 잠깐 나왔지만 속옷사이로 땀이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땀범벅이 된 손을 놓지 않았다. 동네 이름이 상호로 적힌 그 국수가게 유리창에는 여름한정 메밀냉면이라고 붙어 있었다. 메밀냉면. 이름이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었다. 우리 둘은 철제 새시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원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후덥지근한 내부의 열기가 느껴졌다.
난 당연히 메밀냉면을 시킨다고 얘기했다. 그 사람은 메뉴판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가락국수를 시켰다. 덥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그 사람은 가락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다. 그 성격을 알기에 더 말을 하지 않았다. 여름일수록 차가운 음식은 먹지 않는 그 사람. 주변을 돌아보니 대부분 가락국수를 먹고 있었다. 틀린 건 나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가 주문한 메밀냉면이 나왔다.
뚝뚝 끊어지는 메밀면에 무슨 육수인지 알 수 없는 국물과 얼음. 최악이었다. 조금 있다가 그 사람이 시킨 가락국수가 나왔다
"그래 이거지. 가락국수에는 이렇게 쑥갓이 잔뜩 들어가야 돼"
정말 그 사람말대로 쑥갓이 심하게 많이 들어가 있었다. 이런 걸 보고 쑥대밭이라고 한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한입 먹으라고 권하기 시작했다. 쑥이 들어간 국물은 정말 다르다고 했다. 세상에는 쑥이 들어간 가락국수와 그렇지 않은 가락국수가 있는데 쑥이 들어간 것만 진짜라고 했다. 가락국수가 어떤 맛인지 잘 모르겠다. 우동과 가락국수, 이런 게 뭔 차이가 있는 건지 잘 몰랐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한 모금 떠먹고 예의상 너무 맛있다고 감탄사를 내뱉고 역시라며 엄지손가락을 치겨올렸다. 최고네. 그 사람은 만족했는지 앞접시를 가져오더니 국수를 퍼서 내게 주었다. 괜찮다고 내 메밀도 많다고 할 사이도 없이 작은 국수가 내 앞에 생겨났다.
메밀은 최악이었다. 국수는 나름 나쁘지 않았다. 우동인가? 어쨌든. 쑥향을 좋아하진 않았다. 쑥은 약 아냐? 뜸 같은 거 할 때 쓰는 거 말이야. 그랬더니 그 사람은 건강에 좋고 맛도 좋고 하면서 웃었다. 가락국수가 맛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쑥의 향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쑥떡을 먹을 때도, 쑥비누, 샴푸 같은 것을 사용할 때도 가락국수 생각이 난다.
지금도 가락국수나 우동의 차이를 잘 모른다. 면이 좀 얇으면 가락국수. 이 정도만 구분을 한다. 우동이든 가락국수던 간에 먹을 때 쑥이 있으면 기분이 좋다. 그리고 쑥을 많이 넣어주는 식당을 찾으면 망하기 전까지 자주 찾아간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도 혼자서 그 집, 그 동네에서 한참을 살았었다. 그 가게는 점점 유명해지더니 나중에는 사람들이 줄 서 먹는 그런 집이 되었다. 난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또 다른 곳으로 왔지만 여전히 쑥을 많이 넣어주는 가락국수집을 찾곤 한다
오늘 같이 날씨가 더워지면 땅의 흙냄새와 쑥 냄새가 동시에 난다. 건조한 대지에서 올라오는 흙냄새에 내 기억에서 쑥 냄새가 나와 더해진다. 그러면 난 또 쑥을 넣어주는 가락국수를 찾아 가게에 간다. 새로 생긴 프랜차이즈우동 집은 가락국수를 기본으로 하는 우동집이라고 한다. 그게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쑥을 많이 넣어준다는 것이다.
옛날 분위기로 꾸며진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었다. 보통맛의 우동을 하나 주문했다. 큰 우동그릇에 가느다란 면이 담겨있고 쑥과 유부가 가득 올려져 있었다. 이 향과 가락국수는 항상 뭔가를 기억나게 해 줄 듯 말듯하다. 그 사람보다 더 깊이 안쪽에 있는 기억이 있는 것 같은데 쑥향에 묻혀버린다. 쑥향이 기억에서 나와 현실과 합쳐지고 따뜻한 국물이 안으로 넘어가자 차갑고 시린 하루의 기억들이 살며시 녹어버린다.
"이제 여름이 시작이구나. 나가서 옥상에 물을 뿌려야겠어"
보고 싶다. 그 사람을 만지고 냄새를 맡고 싶다. 줄줄 땀이 흐르던 그 손을 다시 한번 잡고 싶다. 머릿속에 온통 쑥향이 가득하다. 여전히 내 인생은, 내 마음은 쑥대밭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