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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ul 07. 2024

사슬, 케이크와 부활의 약들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아흔아홉 번째

아이고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그동안 그러면 약을 한 번도 안 드신 거예요? 힘드셨겠어요. 


네,라고 기어들어가듯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역시 서비스업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약을 안 먹었다고 화를 내거나 다 그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약을 다 버렸다는 고백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지금 기분이 어떤지 괜찮은지에 대해서 물을 뿐이었다.


약이 좀 먹기 힘들었나 봐요. 그러면 약을 좀 바꿔서 다시 시작해 보시겠어요?


또다시 네라고 대답했다. 약이 바뀌던 그대로든 상관없다. 이제는 주는 대로 먹어야겠다. 검은 바다에서 돌아온 이후 나 자신이 혼자서 이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었다. 솔솔 불어오던 자만은 작은 알약들에서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호기롭게 안 먹어 버린 그 날이후로 하루에 2~3그램씩 자신감이 사라졌다. 바른 습관, 강인한 의지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 이런 것 만으로 이 병을 치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약이 없으면 어느 틈엔가 그 근본이 되는 바탕이 없어진다. 일어나려고 다리에 힘을 주었는데 바닥이 없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영원히 약을 먹고 병원에 간다고 해서 실패한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을 했다. 이것은 치유의 과정이다. 죽을 때까지 그렇다고 한들 그게 또 무슨 상관일까. 태어나서 가장 건강한 상태로 죽을 때까지 있는 사람이 있는가. 생명체는 본디 그렇지 않다. 죽음은 천천히 소멸하는 과정의 끝이다.


의사 선생님은 나보고 가장 기분 좋은 일이 뭐냐고 다시 물어보았다. 최근에 있었던 가장 기분 좋은 일. 얼마 전 검은 바다에서 살아 돌아온 것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무서웠고 다시 돌아와서 기뻤지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일요일에 바다에 놀러 갔다가 집에 오면서 커다란 딸기 케이트를 사서 집에 왔어요.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초를 가득 꽂으니 기분이 나아지더라고요.  


그날 낮에 풍선을 끌어안고 바다에 떠다니며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던 얘기는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먹었던 생수가 정말 달고 맛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오면 허세도 돌아오는 것인가. 내가 가져야 할 품격 같은 게 있는 것인가. 나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 앞에서도 속마음을 다 얘기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속마음을 완전히 얘기하게 될 때쯤 되면 내 삶이 끝나거나 이 병이 끝나거나 둘 중에 하나가 되지 않을까.


맛있는 거 먹으니까 기분이 좋죠? 그렇게 하루하루를 기분 좋은 일로 꽉 꽉 채우셔야 해요. 그리고 찾아보면 기분 나쁜 일보다는 기분 좋은 일이 훨씬 더 많을 거예요.


맞아요, 선생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그 작은 기분 나쁜 일이 마치 투명한 물에 먹물이 퍼지듯이 전체를 흐려 버리는걸요. 그래서 그 작은 것에 계속 집착하게 돼요. 하지만 그 말을 내뱉지 않았다. 순식간에 이 방안이 검은 먹물로 가득 찰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은 약을 꼭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천천히 바꿔 나가야 한다고 했다. 한 번에 그렇게 갑자기 바뀔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병이 그렇듯이 한 발짝씩 한 발짝씩 나아가야 한다고. 언제나 제자리인 것 같아 뒤돌아 보면 어느 틈에 이렇게 많이 왔나 싶을 정도로 오랜 세월이 걸린다고 했다.


하지만 선생님 전 이미 너무 오랜 세월을 살았는걸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그맣게 수면제는 하루에 1번 먹을 수 있는 거를 처방해 달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약을 안 먹었으면 예전에 처방한 수면제들도 많이 남지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난 그것도 다 버렸다고 했다. 집에 두통이 넘게 가득 차 있는 수면제 얘기를 다시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약국에서 약을 타서 집으로 왔다. 이번엔 일주일치. 재방문 간격이 줄었다. 일주일에서 이주로 다시 삼주로 늘리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다시 일주일로 돌아오기까지는 십 분의 상담으로 충분했나 보다. 


난 자신이 있었다. 약 없이도 나의 의지 만으로도 분명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루하루 좋은 습관을 들이고 1분 1초 매 순간 노력하고 그리고 좋은 걸로 꽉 채운다면 반드시 이것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담배를 끊을 때도 술을 끊을 때도 마약을 끊을 때도 도박을 끊을 때도 약을 끊을 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동일한 문제이다. 항상 문제는 내가 그것을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끊을 수 없다. 평생 그것은 나와 같이 가야 한다. 참을 뿐인 것이다. 그리고 참기 위하여 운동을 하고 습관을 들이고 약을 먹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끊을 수 있다고 자신하는 순간 나는 실패하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서 집 정리를 시작했다. 책상을 정리하고 이불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두 번이나 돌렸다. 그리고 창문틈을 꼼꼼히 다 닦아 냈다. 바닥에 땀이 흘러내리면 걸레로 다시 닦아 냈다. 냉장고에 안 먹는 음식들을 정리했다. 반찬통에 담겨있는 색이 이상한 음식물들 모두, 아직은 멀쩡해 보이는 배달음식의 잔재, 먹다 남은 참치, 햄, 카레라이스.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 꺼내서,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벌써 몇 봉지가 나왔다. 그리고 냉동실을 열어 하나하나 꺼내어 싱크대에 담은 물에 녹였다. 끝없이 나오는 얼어붙은 내 마음의 조각들. 


냉동실에는 그날 사온 케이크가 한조각도 먹지 않은 상태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샤워를 하고 흠벆 젖은 옷을 세탁기에 돌리고 나니 어느덧 밤이었다. 핸드폰을 보니 회사에서 온 부재중 전화가 몇 개 남아 있었다. 오늘 출근 안 하냐고 묻는 문자도 하나 남아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난 식탁에 앉아 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테이블 위의 노란 조명을 켰다. 그리고 가장 예쁜 접시를 꺼냈고 지난 수년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나이프와 포크도 꺼냈다. 케이크에 다시 초를 꽂았다. 이번엔 두 개. 불을 붙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촛농이 하얀 케이크 위로 떨어졌다. 입으로 바람을 불며 소원을 빌었다.


깨끗한 나이프로 케이크를 자르기 시작했다. 6등분으로 예쁘게 잘랐다. 그중 한 조각을 나이프로 떠서 내 접시에 올려놓았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차려준 것처럼 예쁜 접시에 케이크 한 조각을 담아 내 앞에 놓았다. 포크로 크림과 빵과 과일 부분을 한 번에 떠먹었다. 단맛이 온몸을 타고 넘실거린다. 다시 한번 소원을 빌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이 세상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아무리 바보 같아도, 남들이 매일 뒤에서 욕을 해도 난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 "


케이크 한 조각을 다 먹고 마음이 불안해지면 먹으라고 주었던 약을 먹었다. 잘 시간까지 아직 한참이 남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약을 먹었다. 자기 전까지 맛있는 케이크의 단맛과 그 약이 나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남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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