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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고 따듯해서 울어본 적 있나요?

그것도 어린이 집 졸업식에서? 전 처음입니다.

by 성실한 베짱이

수 차례 졸업식에 있었다. 졸업식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 졸업을 했구나..., 정도만 기억날 뿐 졸업식 후 무엇을 먹었는지, 누가 왔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머리에 남아있지 않다.


지난주 찐이의 어린이 집 졸업식은 그러지 않을 듯했다. 가기 전부터 가슴이 울렁거렸다. 코로나로 인해 약식으로 한 가족씩 돌아가며 사진을 찍었던 그 졸업식 내내, 눈물은 마스크를 적셨다.


눈물이 많은 편이다. 무한도전을 보면서도 참 많이 울었으니 말 다했다. 그 울음엔 이유가 있었다. 슬퍼서, 벅차올라서 울었다. 찐이 어린이 집 졸업식에서 흘린 눈물은 설명이 힘들었다. 슬프지도, 벅차오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눈물은 흘렀다.


찐이는 발달장애가 있다. 젖을 잘 빨지도, 몸을 잘 뒤집지도, 고개를 잘 들지도, 잘 앉지도, 잘 기지도, 잘 걷지도 못했다. 하루에 수십 번 경련을 하고 어떤 해는 몇 달을 입원실과 응급실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 찐이를 데리고 통합 어린이 집(발달 장애를 가진 아이와 비장애 아동을 함께 보육하는 곳)에 갔던 그 날이 떠올랐다.


찐이가 4살이 되던 해였다. 아주 조금씩 걷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어린이 집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옆에는 걷기보다는 기는 게 편했던 찐이가 있었다. 장애가 심해 보육이 힘들다 판단되면 아이를 맡을 수 없다고 전화상으로 이야기했던 터였다. 수년 전 회사 면접을 볼 때 보다 더 떨리는 마음으로 선생님과 대화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나와 아내의 눈빛이 마음에 남아 찐이의 보육을 결정했다고 한다.


단 몇 시간이라도 찐이를 어린이 집에 맡길 수 있었다. 이제 아내가 자신만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아내는 걱정했고, 어린이 집 밖을 서성였다. 처음 2년은 선생님의 불평과 불만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찐이가 이래서 힘들었다, 저래서 힘들었다, 현장학습은 오지 마라, 지금 아이를 데려가라... 아내의 불안은 심해졌고 어린이 집을 보내는 게 오히려 더 힘들 지경이었다.


찐이가 6살이 되던 해, 선생님이 바뀌었다. 찐이가 '주~'라고 부르는 선생님이다. 어린이 집에서는 선생님과 매일매일 편지를 주고받는다. 아내는 단 한 번도 그 편지를 잊지 않았다. 주어진 칸에 깨알 같은 글씨로 한 가득 찐이와의 이야기를 써서 보냈다. 찐이의 '첫' 선생님은 무성의한 글씨체로 한 두 문장 정도를 적었더랬다. 주로 찐이가 밥을 잘 먹었다, 잘 먹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원래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주~' 선생님은 달랐다. 더 깨알 같은 글씨로, 선생님에게 주어진 칸을 모두 채워 오늘 어린이 집에서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를 정성스럽게 적었다.


찐이는 평생 기저귀를 차고 우리는 평생 찐이의 똥 빨래를 하야 할 거라 생각했다. '주~'선생님은 찐이와 우리를 처음 만난 그 해에 올해 안에 기저귀를 떼 보자고 말했다. 우리는 반신반의했지만 찐이는 마법처럼 기저귀를 뗐다.


현장학습도 갈 수 있다고 말했다. 만들기도, 특별 활동도 비장애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다고 했다. 찐이는 직접 만든 액자, 장난감을 하나둘씩 집으로 가져왔다.


'주~'선생님은 찐이에게 사랑을 주었다. 우리에겐 용기를 주었다. 이게 안 되고, 저게 안 된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주~' 선생님에게 찐이는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는 아이였다.


부모 참여 교육은 잊을 수 없다. 그냥 돌아다니고, 흥분하고, 소리 지르며 수업을 거부할 줄 알았다. 전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 아빠와 앉아서 실험을 하고, 영어 수업에서는 한국말도 몇 단어 모르는 놈이 어떻게 외웠는지 "마이 네임 이즈 찐이"를 외치더라.


처음에 1시간도 채 머물지 못했던 어린이 집에 '주~'선생님을 만나면서 3시까지 머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우리 가족에게 웃음이 조금씩 찾아온 게 아니었나 생각하기도 한다.


어린이집 졸업식. 찐이가 이런 어린이 집을 졸업하고 이제 학교에 간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찐이가 '주~'선생님을 꼭 안아주는 모습을 보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마스크가 계속 젖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찐이가 갈 듯, 갈 듯 안 가고 졸업식 장 앞에서 춤까지 추는 바람에 안녕히 계시라는 인사를 5번이나 했다. 서로 울며 작별 인사를 5번이나 하다니...


집에 도착하는 길에 겨우 감정을 추슬렀다. 그러나 '주~'선생님 때문에 집에서 '엉엉' 울었다. 엉엉 울어 본 건 오랜만이었다.


찬찬히 졸업 사진과 선물을 꺼내어 봤다. 그 사이에 사진책이 하나 눈에 띄었다. '주~'선생님이 직접 만든 사진책. 찐이를 만났을 때부터, 3년간, 자신의 핸드폰으로 하나씩 찍은 사진을 모아 만든 것이었다. 직접 사진을 고르고, 직접 멘트를 적어 넣고, 직접 주문하고, 직접 계산한 사진책이었다. 찐이의 어린이 집 3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진 하나하나마다 깨알 같은 멘트까지 있었다. 깨알 같은 글씨로, 매일매일 찐이의 하루를 알려주었던 그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채워진 편지도 있었다.


찐이 어머님, 아버님께,

찐이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졸업하는 날이 되었네요. 두 분이 함께 면담도 와주시고, 현장 학습도 참여수업에서도 함께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보기 좋은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무엇보다 찐이를 위해 귀 기울이시고 노력하시는 모습에 많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너무나 예쁘고 사랑스러운 찐이와 너무나 좋으신 부모님과 함께한 3년의 시간은 제겐 너무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담임 발표가 날 때마다 찐이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코로나로 인해서 20년도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함께 한 좋은 추억 간직하며 지내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그리울 것 같아요... ㅜㅠ 언제나 찐이를 응원하겠습니다.


장애 아동과 관련된 흉흉한 기사들이 너무 많았다. 국민 청원도 많았고, 이로 인해 걱정이 산더미처럼 쌓였었다. 찐이가 학대를 받는 건 아닌지, 학교에 가서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지 하루에도 수십 번 가슴이 뛰었다. 이제 걱정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뛰는 가슴도 진정시켰다. '주~' 선생님 덕분이다.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그때는 설명할 수 없었다. 슬픔도, 벅차오름도, 상실감도, 걱정도 아니었다. 그건 '고마움'과 '따듯함'이었다. 찐이의 졸업식은 고마움과 따뜻함 때문에 울었던 내 인생의 첫 번째 날이 되었다. 엉엉 울며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주~ 선생님께,

선생님을 만난 3년이 저희에게 더욱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세상이 장애에 대해 가진 편견만큼이나 나도 세상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모두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 덕분입니다. 선생님의 사랑이 앞으로 우리 가족의 평생을 지켜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어쩌면 처음으로 느껴 본 종류의 사랑이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우리 가족에게 웃음을 가져다주신 분, 안심을 가져다주신 분. '주~'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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