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삶이다. 인식을 하든 인식을 하지 않든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는 지금도, 앞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능동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도 있고, 수동적으로 세계가 만들어지는 사람도 있다. 능동이 좋은 것도, 수동이 나쁜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사람의 세계가 그런 거다. 그렇게 수 십 년 간 만들고 혹은 만들어진 세계가 깨어질 때가 있다.
내가 처음으로 세계가 깨지는 느낌을 받았던 건 대학에 들어갔을 때다. 고등학교 때까지의 어른들에 의해서 강요받았던 세계였다. 아침 일찍 학교에 가서, 졸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는다. 공부는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을 외우고 문제집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푸는 것이다. 부모님의 말씀에 토 달지 않는 것이 자식으로서의 본분이며, 좋은 학생이라면 응당 잠자는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고 좋은 성적을 내야만 한다. 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 세계가 대학에 가서 깨졌다. 내 마음대로 수업에 빠진다. 혼자 책을 읽는 것도 공부다. 혼자 할 수 있는 것, 혼자 결정해야 하는 것이 많아졌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생겼다. 그렇게 내 세계의 경계가 조금 허물어졌다. 물론 부모의 경제력이나 권위에 기대어 책임은 그대로고 권한만 많아진 시기였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왔다고 느꼈지만 착각이었다. 난 뭐라 이름 붙이기 힘든 트랙에 올라선 듯하다. 목적이나 이유는 모른 채 달리기 시작했고 여전히 달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좋다고 하는 길, 부모님이 그나마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성취를 좇았다. 트랙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앞사람의 꽁무니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트랙 주변을 둘러볼 시간보다는 토익 점수를 올리고, 회사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과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했다. 앞사람은 그렇게 달리고 있었고 나도 어서 달려가서 동기들에게 첫 월급으로 술을 사고 싶었으니까.
첫 월급으로 술을 사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내 세계가 깨질 만한 사건이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난 트랙을 달렸고, 주변 사람들도 달렸다. 내 주변 사람들도 끊도 없는 트랙을 달리고 있다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되었다. 학교를 다닐 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수학의 정석이 엑셀로, 성문 기본 영어가 PPT로 시험 성적이 영업 실적으로 바뀐 것뿐이었다. 내가 지금 왜 뛰고 있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뒤쳐지면 안 되니까. 그 불안감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찐이가 나에게 오지 않았으면 난 여전히 이 트랙에서 쫒아오는 뒷사람을 힐끗 보며 앞사람의 엉덩이에 집중하고 있었을 거다. 찐이가 온 그 날, 내가 속해있었지만 몰랐던 세계까지 함께 왔다. 바로 '비장애인'의 세계였다.
홍은전 작가는 <그냥, 사람>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꿈도 꾸지 못할 자유를 아무 노력 없이 누리면서도 일상의 작은 불편조차 장애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그들을 격리하고 가두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인구의 10퍼센트가 장애인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일상적으로 자신들의 가해 사실을 인식할 수조차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세계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자리를 내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그러나 찐이가 오자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세계를 제대로 몰랐다는 것을, 뭐가 뭔지 모르게 그냥 술 마시고 노래하며 즐거운 척하며 살고 있었다는 것을.
첫째를 큰 걱정 없이 초등학교에 보냈던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쏘아대는 따가운 시선 없이 마음대로 놀이터에 아이를 데려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알았다. 키즈카페에 가고, 시립, 구립이라 이름 붙여 있는 체육시설을 이용하는 것이 얼마나 큰 혜택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자유롭게 캠핑을 가고, 극장을 가고,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가고, 직업을 갖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하고 싶어도 할 수없거나 오랜 노력 끝에 얻어지는 혜택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누리던 세계는 깨졌고 난 비로소 트랙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트랙에서 내려오니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그 세계를 이제 조금씩 알아가 보려고 한다. 다시 트랙에 올라갈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