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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Sep 19. 2020

화분이 자꾸 죽는다.

신혼집은 과천이었다. 아내의 직장과 내 직장의 중간 지점이었다. 잠깐 들른 과천에 우리는 매료되었다. 어디든 걷기만 하면 산책길이 되는 마법을 보았다. 서울대공원, 현대미술관도 슬슬 걸어도 한 시간 이내로 도착할 수 있었다. 집은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16평으로 좁았고, 녹물이 나오고, 페인트가 벗겨져 휘날렸지만 우리는 과천에 살기로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장인어른은 3층까지 큰 화분을 하나 들고 오셨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습도를 조절하고 공기를 정화하는 기능을 했었던 듯하다. 그 화분을 시작으로 화분 잔혹사 써 내려갔다.


과천에서 2년을 살았고 치솟는 전세 값을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이삿짐 차에 모든 짐을 실었지만, 화분은 실을 수 없었다.


몇 개의 화분이 죽고, 몇 개의 화분이 새로 들어왔다. 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내는 화분에 조금은 감정이입을 한 듯했다. 죽어나간 화분을 정리하며 남아있는 화분을 살려보겠다는 의지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벌레가 생긴 화분에 식초를 뿌렸다. 잎사귀 뒷면에 살던 벌레들은 식초로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라졌다. 주기적으로 쌀뜨물을 주었다. 나도 쌀을 씻을 때 화분에 줄 쌀뜨물이 필요한 지 묻게 되었다.

잎사귀의 색깔이 변했다. 전에는 노란색이 섞인 듯 옅은 연두색이었다면 이제는 짙은 초록이 되었다. 손으로 툭 건드리면 떨어질 듯 아슬아슬 매달려있었다면, 이제는 손으로 잡고 비틀어야 떨어질 듯 굳건해졌다.


아내는 화분에 '관심'었다. 한 달에 한 번도 주지 않던 눈길이었다. 그 눈길이 매일 화분을 향했다. 신경 쓰지 않던 화분의 몸 상태를 매일 신경 쓴다. 아프지는 않은지, 벌레가 귀찮게 하지는 않는지 살펴본다. 영양은 부족하지 않은지 살핀다. 너무 많은 물을 주지는 않는지, 너무 물을 부족하게 주지는 않는지 생각한다.


화분에게 이렇게 자라라던지, 여기에 가지를 하나 더 만들라던지, 꽃을 빨리 피우라던지, 꽃의 색깔은 이렇게 하라던지, 지금이 바로 영양분을 먹고 가지를 더 굵게 해야 할 시기라던지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그저 관심을 가지고 해야 할 일만 할 뿐이다. 그럼 알아서 건강하게 자란다.


관심이면 된다. 아이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면 공감할 수 있다. 공감은 아이의 마음을 활짝 연다. 마음을 연 아이는 위험하고,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관심이면 된다. 관심을 가지면 아이의 상태를 알 수 있다. 아이는 안전하다 느끼고, 그 아이는 어떤 꿈이라도 꿀 수 있다.


대부분 부모는 아이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한다. 아이에 대한 관심인지, 아이에 대한 자신의 욕구인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아이에게 자신의 욕구를 투영시키고, 그것을 아이에 대한 관심, 사랑으로 착각곤 한다.


아이가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아이가 영어 시험을 잘 봤는지, 수학 성취도는 좋은지, 어느 학원을 보내야 하는지 신경을 쓰는 건 아이에 대한 관심이 아닐 수 있다. 아이가 좋은 성적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무슨 일이든 잘했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욕구에 대한 관심이다.


화분이 자라는 과정에 관심을 주지 않고, 결과에만 관심을 쏟는다면 화분은 죽는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해 줄 화분을 만들려고 해도 화분은 죽는다. 아이도 그렇다.


가끔 아이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빠! 나 잘 그렸지?"
"오~~~ 정말 그런데! 빤뽀가 그림 그리며 집중하는 모습이나, 어떻게 그릴 지 구상하는 모습이 정말 멋지네"


이렇게 답하면 아이는 그럼 잘 못 그렸다는 거야?, 그냥 잘 그렸다고 한 마디 해주면 안 돼?,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너무 아이에게 결과에 대한 칭찬만 해준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아이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 과정을 바라봐야겠다. 화분을 키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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