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의 인정을 받으려 애쓰지 않기
시키는 일만 했다. 시키는 일을 잘해서 칭찬받고 싶었다. 상사의 인정을 갈구했다.
시킨 사람의 마음을 읽으려 했다. 시킨 일 자체를 바라보기보다는 시킨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는 데 더 집중했다.
난 똑똑한 편이다. 그래서 알았다. 상사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그렇게 일했고 일 잘한다, 는 소리를 들었다.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승진 대상이 되던 해, 육아 휴직을 했다. 휴직 중인 채로 승진 시험을 보았다. 당연히 누락. 난 상사의 인정, 회사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괴로웠다. 그럴 거면 왜 육아 휴직을 했냐고? 흠... 이유가 길다. 육아 휴직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고, 만약 그대로 회사를 다녔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해두자.
육아 휴직은 나에게 회사가 없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회사가 없어도 내 인생의 하루는 계속된다. 시키는 일, 상사의 인정이 없어도 내 인생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의미 있었다. 당연한 거라고, 당연히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몰랐었다.
일을 열심히 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보다 훨씬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일이 많았다. 아내와의 대화와 아내의 웃음이 그랬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간과 아이들과 노는 시간이 그랬다. 책을 읽는 시간이 그랬고 글을 쓰는 시간이 그랬다. 달리기를 하는 시간이 그랬고 아내와 아이들과 손을 잡고 걷는 산책 길이 그랬다.
육아 휴직이 끝나고 퇴사를 목표로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라 퇴사를 위한 연습을 목적으로 회사를 다녔다. 회사가 주는 돈에 의존해서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다니는 것이 아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퇴사 후 만나게 될 회사가 없는 삶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실로 회사를 생각했다.
그랬더니 회사는 엄청난 혜택을 주는 연습실로 변해버렸다. 회사 덕분에 난 마이너스 대출을 빵빵하게 당겨 쓸 수 있었다. 회사의 사무용품은 공짜로 제공된다. 보고서는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설득・전달하는 연습에 최적화된 툴이었다. 회사는 이런저런 교육을 공짜로 시켜주었다. 의료보험도 국민연금도, 퇴직연금도 나에게 주어지는 혜택이었고 월급은 우리 가족의 생활비로 아주 소중하게 쓰였다. 난 돈을 받으며 내 인생을 연습할 수 있었다. 그것도 쾌적한 환경과 다양한 혜택 안에서. 5일을 일하고 2일을 쉰다는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목표를 빨리 이루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었다.
일을 대하는 태도, 방식도 달라졌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했다. 상사의 의도를 파악하여 좋은 결과를 내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일로 인해 얻어지는 결과보다는 일을 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중요한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나누는 연습을 했고,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없애거나 투입 시간을 줄이는 방법을 고민했다. 대부분의 일에 내 의견을 정리하여 덧 붙였다.
그렇게 일을 하면 할수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나에게 주어졌다. 단순한 운영 업무를 떼어내고 현상을 분석하고 방향에 대한 근거를 마련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기획하는 업무를 하나씩 확보할 수 있었다.
죽기 전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퇴사>다. 당연히 퇴사를 위한 연습이 필요하다 생각했고 실행에 옮겼다. 그 결과 더욱 실전에 가까운 사내벤처에 선발되었다. 연습의 시간들이 사업계획서에, 프레젠테이션에 녹아들어 갔다. 사내벤처는 퇴사 백신이자 모의 고사다. 퇴사 후 실패에 대한 면역력을 높여주며, 수능 당일 적응력을 높여주듯 퇴사 후 인생에 적응력을 높여준다.
시키는 일만 하고 상사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전력을 다했던 회사원이 내가 원해서 일을 하고 고객의 니즈를 파악하기 위해 집중하는 스타트업의 대표가 되려 하고 있다. 누군가 스타트업을 즐거운 가시밭 길이라고 하던데, 흥분과 두려움이 단짠의 조합처럼 날 자극한다.
상사는 과정을 보지 않는다. 대부분 결과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언젠가 맞이할 퇴사를 준비하고 싶다면 과정에 집중할 수 있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사의 인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사의 인정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상사의 인정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상사의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렇게 질문해보면 어떨까?
"나 김 부장에게 인정받기 위해 회사 다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