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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Mar 25. 2021

바퀴벌레

※ 이 글은 소설의 형식을 빌려썼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붕붕붕.

무언가가 내 머리를 돌고 있다.

붕붕붕.

거슬린다.

녀석이 오른쪽 관자놀이 위에 앉았다.


지끈.

관자놀이를 파고든다.

지끈.


설마설마했는데 쑥 안으로 들어간다. 꾸물꾸물 오른쪽 관자놀이 위에서 뒷 머리로 내려온다.


바퀴벌레.

바퀴벌레가 머리에 들어갔다. 두개골과 두피 사이에서 바퀴벌레가 꾸물거린다. 관자놀이와 뒷 머리를 꾹꾹 눌러본다. 바퀴벌레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젠 한 마리가 아니다. 이곳저곳 미친 듯이 돌아다니며 지끈거린다. 뒷 목이 뻣뻣해진다. 주물러도 소용없다.


— 이 과장

— 네 김 부장님.

— 어제 지시했던, 자금 이전 관련 세부 지침은 초안 만들었니?


바퀴벌레가 더 세차게 움직인다. 낯빛은 점점 어두워진다. 내 기분을 눈치챘는지 김 부장도 고개를 까딱거리며 양미간이 꿈틀거린다. 시킨 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지금도 일이 많아 죽을 것 같다. 더 이상 일을 받았다간 바퀴벌레가 되어버릴 것만 같다. 게다가 이건 내 일도 아니다. 바퀴벌레가 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 이 과장!

— 아! 네!

— 검토 안 했어?

— 네 아직 검토 전입니다.

— 지금까지 뭐 했어?

— 일단, 실행이 6개월 후 입니다. 시간이 넉넉히 남은 시점에서 조급하게 진행할 필요는 없고요, 게다가 타 부서 커뮤니케이션해봤더니 꼭 세부 지침을 문서화해야 하냐는 입장입니다.

— 누가 그래?

— 추 부장입니다.

— 그건 추 부장이 아주 잘못 생각하는 거야!

— 그리고, 이 일은 우리 팀에서 해야 할 일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케팅 관점에서 이 일을 해야 할지 말지 검토하고 결정하면 되지 실행에 대한 세부 지침까지 우리가 할 수는

—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그쪽에서는 그렇게 생각 안 할 거야. 최소한 초안이라도 잡아서 줘야 해.


(그럼 네가 하던가!)


목구멍까지 이 말이 차올랐지만 다시 삼켰다. 김 부장은 귀까지 빨개졌다. 여러 해 봐왔지만 이 사람은 자기 의견에 반대하는 꼴을 못 본다. 자기는 쿨한 척, 의견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척 하지만 대놓고 반대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말은 빨라진다. 가끔 말을 더듬을 정도로 분노가 차오르기도 하지만 아닌 척한다. 김 부장을 빼고 다 알고 있다. 쿨하고 싶고, 꼰대가 아니고 싶으나 인정 욕구로 가득 차 있는 그 속을 어찌 달랠 수 있겠는가. 인생 참 힘들게 산다. ㅋㅋㅋ 내가 지금 누구 걱정하는 거냐. 머릿속에 바퀴벌레나 달고 다니는 주제에.


— 일단, 빨리 초안 잡아서 와.

— 네


지이이잉.

카톡이다.

'대형을 시켜야 하는데 왜 중형을 시켰어?'


잉? 그럴 리가! 분명히 대형을 시켰는데.


마이 쿠팡을 열었다. 젠장. 중형이다. 중형을 시켰다. 바퀴벌레가 요동을 친다. 바퀴벌레는 머리가 없어도 1주일은 살아있다. 우주로 나간 최초의 곤충, 우주에서 번식에 성공한 최초의 곤충이다. 우주 방사능, 급격한 온도 변화도 견디는 바퀴벌레는 지금 내 이마까지 침범했다.


중형을 환불하고 대형을 사려고 봤더니 대형은 이미 매진이다. 어제가 마지막 기회였는데...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여름이 되면 라이트 핏이 필요한데, 중형을 쓰면 내 귀는 한 달 이내로 떨어져 나가겠지. 떨어져 나간 귀는 바닥에 떨어져 바람에 날려 굴러갈 거다. 귀를 잡으로 달려가 보지만 조급한 마음에 내디딘 내 발에 차여 더 멀리 날아간다. 날아가는 귀를 보며 아... 젠장... 대형을 샀어야 했는데... 후회할 거다. 한쪽 귀가 없어진 나는 더 이상 마스크를 쓸 수 없고, 코로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불안에 떨며 살아가겠지.


쿠팡 앱을 닫고 시계를 보니 소리 소문 없이 퇴근시간이 다가와있었다. 팀장은 오늘 회식이다! 를 외쳤지만 무시하고 나왔다. 오늘 회식인데 어딜 가냐는, 약속 있냐는 팀장의 말에 아니요,라고 수줍게 웃으며 대답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어이없어하는 팀장의 눈빛이 뒤통수에 느껴지지만 머리에 담긴 바퀴벌레를 생각하니 큰일도 아니었다.


빌딩 밖으로 나오니 아직 해가 다 지지는 않았다. 얼마 남아 있지 않은 태양의 온기를 느껴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집으로 가기 전 어디는 한 군데 들리려고 했지만 들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지하철역에 잠시 앉아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지하철이 오고 가는 소리, 누군가의 통화소리가 들렸다. 눈을 떴다.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어슬렁어슬렁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서로 부딪히지 않는 이유는 느리게 걷기 때문일 거란 생각을 해본다. 아니지 스마트 폰을 쳐다보며 내 앞의 장애물까지 신경 쓰며 가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내 머릿속 바퀴벌레는 여기저기 전부 다 신경 쓰며 살기 때문에 파고 들어왔을 수도 있다. 애드빌 2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들이켰다.


젠장. 한 알만 넘어가고 한 알은 입천장에 붙었다. 다시 물을 마셔 남은 한 알을 삼켰다. 아... 이제 괜찮아지겠지. 쓴맛이 계속 입에 감돌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어른이 되긴 되었나 보다. 약의 쓴맛을 견딜 수 있으니.


집에 가면 좀 쉴 수 있을까? 아내도 오늘 하나도 쉬지 못했을 텐데. 나만 오길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냥 좀 못된 사람이 되고 싶다. 얍삽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지. 난 이미 얍삽한 사람이다. 아내 몰래 반차를 내고 등산을 갔으니 말이다. 죄책감은 상당했다. 죄책감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한 맥주가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즐겁지 않았을 거다. 등산을 마치고 한 잔 마신 맥주는 싱그러울 지경이었다. 몰래 반차를 아내에게 걸린 후 싱그러움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날아가 버렸지만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집에 도착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기 전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다 떨어낸다. 애드빌 2알이 바퀴벌레를 밖으로 내몰았다. 코로, 입으로, 눈으로 바퀴벌레가 쏟아져 나온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해본다. 툭툭 바퀴벌레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순식간에 사라진다. 집에는 한 마리의 바퀴벌레도 들여보내선 안된다. 한 번 더 심호흡 후 집으로 들어간다.


— 얘들아 아빠 왔다.

— 아빠! 차렷, 공수, 안냐세요

— 그래그래. 내 새끼들

— 왔니......

— 응! 오늘도 정말 고생 많았다!


바퀴벌레 방역은 일단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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