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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실한 베짱이 Jan 13. 2024

속상해서 쓰는 글

둘째는 중증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10살이 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치료실을 다녔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30~40분 정도 수업을 하고 10분 정도 선생님과 상담을 한다. 어떤 내용으로 수업을 했고, 아이는 어땠는지 이야기 듣는다. 그 10분에 좌절감을 맛보는 경우가 많다.


아이가 너무 흥분해서 수업이 안 된다.

수업 태도가 너무 안 좋다.

아이가 짜증이 너무 많다.

지시를 따르지 않아서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내가 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인가?

내가 요새 너무 편한가?

아이에게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하는 건가?

이미 내 인생은 없는 것 같은 느낌인데… 부족한가?


공포가 뒤를 잇는다.


이러다 중학교에 가면 친구들에게 맞는 거 야냐?

흥분에서 여기저기 달리다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건?

내가 죽으면… 아이는 혼자 살 수 있을까?


작은 두려움이 더 큰 두려움을 몰고 오고, 숨을 쉬지 못할 만큼의 공포를 데려온다.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왜 사람들은 우리를 혐오의 시선으로 바라볼까? 내가 어떤 죄를 지었길래 우리를 이렇게 취급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한다고 더 나아지는 건 없다. 그렇지만 이런 문자를 받을 때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수업 3일 전-
“안녕하세요. 000언어치료센터입니다. 이번 주 토요일 000선생님 수업을 못하게 됐습니다. 혹시 일요일에 수업이 가능하신지요 회신부탁드립니다.”

“네. 일요일도 가능합니다.”
-수업 2일 전-
“선생님 안녕하세요. 000 엄마입니다. 수업 몇 시에 할 예정이신지요? 알려주세요.”
-수업 하루 전-
“넵 시간은 그대로가 될 것 같은데, 시간 확정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이 치료실 인기가 많다. 어떻게든 들어오려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만큼 이 땅에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나 교육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반증일 수 있다. 어쨌든, 여기는 인기 많은 곳이고 우리는 정말 정말 정말 기적적으로 운이 좋게 겨우겨우 토요일 한 타임을, 그것도 일시적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가 그만둔다고 하면 아마 그 자리에 들어온다는 삶이 번호표 뽑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문자를 보내면 안 된다. 


이건 그저 타인을 대하는 태도다. 수업은 약속이다. 그 약속을 바꾸는 사람은 일단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한다. 미안함은 빠져 있고 그 자리에 당당함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가 바꾼다고 하면 바꾸는 거지 뭐 그래 말이 많아!'


맥락을 상대방에게 설명 해야 한다. 수업 시간을 옮기는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지 못 할 개인적인 사유라면 개인적인 일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줘야 한다.


바뀌는 시간은 언제인지 알려줘야 한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 수업만을 목 놓아 기다리는 사람인건가? 그런 사람에겐 ‘수업 못하니 다음 날 하려면 하든가? 시간은 나중에 알려줄께’라고 말한 후 전날 저녁에 통보해 주면 되는 건가?


속상하고 슬프다. 술을 한 잔 했더니 더 그렇다. 괜히 술을 마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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