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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일라 Nov 07. 2020

낡은 책들과의 이별


    새벽 세시 즈음에야 겨우 잠에 들었고, 아침 여덟 시 반에 눈을 떴다. 더 자고 싶었지만 책을 구매하겠다는 메시지들이 울려댔기 때문에 핸드폰을 켰다. 이미 한참 전에 읽어 필사까지 마친 책들을 중고장터에 나누려 마음을 먹은 후, 지난 저녁 사이트에 올렸는데 생각보다 많은 연락이 왔다. 손때가 묻은 책들 모두 의연하게 전부 책장에 줄을 맞춰 나란히 팔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파리의 여러 서점들에서 구매하고 전시장 찾아다니며 얻은 카탈로그들, 예술, 건축 잡지, 철학, 에세이 등 대략 30-40 권이 되었고, 알라딘 중고서점 또는 동네 독립 서점에서 사 매번 한국을 오가며 캐리어에 꾹꾹 눌러 가져왔던 한국 책 또한 비슷한 권수였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 되어주는 동시에 다 읽고 되팔면 한 끼 어치의 식사가 돼주기도 하는, 여러모로 고마운 물건이다. 마침 가능한 시간에 집 앞에서 구매자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나서 몇 권의 책을 팔았다. 오랜만에 손안에 들어오는 짤랑거리는 동전을 바라보다가, 바로 빵집으로 직행했다. 늘 구매하는 플랑 한 조각과 마들렌을 봉투에 받고 나서 저녁에 글을 쓰며 심심할 때 먹을 슈켓 한 바켓 마저 사서 돌아왔다. 빵 몇 덩어리에 마음이 풍족해졌다. 구매자와 판매자 모두에게 이로운 거래였다.



    그러게 몇 번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몇 주 후엔 갖고 있던 책의 80%가 팔렸다. 나머지 팔리지 않는 책은 한번 더 읽고 원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생각이었다. 미니멀과 가까운 그 무엇과 비슷해져 가는 집을 보면서, 그래. 언젠가 훅 떠날 수 있는 상태를 만들자 라던 다짐이 드디어 현실과 맞닿게 된 건가 싶다. 옷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나누어 주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면서 조금씩 마음은 물론 몸도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침대 탁상 옆과 책장 구석에 놓은 몇 권의 책은 절대 팔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달의 책을 한 권 고르자 하다가 고른 책이 생각해보니 내 인생 전체를 통틀어 단 한 권뿐인 책이 되었는데, 내게로 오기까지의 여정을 생각해보면 이루 결코 나눔 할 수 없는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맨 첫 장부터 마지막 부록까지 전부 필사를 한 적은 처음인, 그런 책이었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한 애정이 컸다. 나의 ‘일상’의 일과, 이슈, 사건을 이해하는 능력을 높여주고 새롭고 더 복잡한 인식 체계를 제공해 준 이 책의 저자에게, 이 책을 소개해준 분에게 아직도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



    물론, 미니멀한 삶을 추구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동안 딱히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중 책이 가장 처치 곤란인데, 팔거나 주려고 정리해 놓은 책만 발치에 쌓여갔고, 결국 정리하는데 몇 주나 걸렸다. 파리에서 북 콜렉터가 될 것도 아니니 미련 없이 버리자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구매자에게 팔려가기 전, 마지막 의식 같은 느낌으로 책의 표지들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전부 다시 읽기란 불가능했기에. 주말은 그동안 챙기지 못한 몸과 마음을 주섬주섬 껴안느라, 사소하면서도 자잘한 집안일, 빨래, 장보기, 대인관계 유지, 시험 준비 등을 시간을 쪼개 하느라 눈 깜박할 새에 지나갈 것이다.






    이제야 여름이 한 풀 꺾였지만 벌써부터 겨울을 생각하는 바지런함을 떨고 있다. 지난여름이 오면 갈음할 것들 글에도 말했듯이, 이번 가을이 지나면 프랑스를 잠시 떠나 다른 나라의 삶을 향유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시원한 바람의 풍요로움이 도시를 살랑이는 정취의 계절, 가을을 누리는 대신 바지런히 떠날 준비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낡은 책들을 처분하고 나니 왠지 미안한 감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보낼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열심히 필사해놓을걸. 한 번이라도 더 들춰보고, 종이 결을 쓰다듬어 줄걸. (띠지 가차 없이 버리지 말걸...) 책에 갖는 감정이 어떻게 지난 연인보다 더 아련할 수 있나 싶다. 나는 처음 책을 서점이나 길거리에서 발견하고 첫 장을 넘길 때, 작가가 씨름하는 사유들 속에 빠지는 황홀한 느낌을 좋아했다. 늘 가벼웠던 나의 지갑에 어쩌다 지폐 몇 장과 동전이 들어오면 바로 근처 서점으로 직행하곤 했다.



    내가 단골이었던 파리의 서점들은 우연하게도 전부 독립 서점으로, 책의 다양성, 즉 문화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숱한 위기와 싸워온 단단한 운영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구에서 구를 튼튼한 신발을 동여매고 넘나들며 두 골목 건너마다 위치한 서점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오래된 희귀 고서점에서 동화와 만화책이 가득한 아동 서점, 관광지 중심에 위치한 서점, 빌려주는 서점, 레코드 서점 등등. 매일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넘어오는 오래된 고서적들, 입고되자마자 팔리는 이탈리아 가곡 악보들, 거장들의 소설 시리즈들... 보로컹트나 소상인들 사이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한 손 크기 책부터 두꺼운 논문집까지 가득한 파리는 그야말로 활자의 천국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파리에 위치한 서점들은 다양한 위기를 겪어왔다. 거대 자본인 아마존이 등장하며 높은 할인율과 배달 서비스로 고객 점유에 독재를 휘두를 때, 사람들은 이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굳이 동네 서점까지 걸어가 원하는 책을 주문하고, 기꺼이 3-5일을 기다려 책을 받기를 선택했다. 서점 주인과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 독서에 대한 대화를 사람들과 나누는 기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했다. 내 안의 수많은 잠자고 있는 영혼들, 그 영혼들이 머무는 자리엔 늘 책이 존재해 왔다. 경제적, 심리적 정리를 한 번 행하고 나니 책을 고르며 느끼던 짜릿함을 이제 더욱 자유롭게 항유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텅 빈 책장은 또 채워 넣으면 되고, 읽을 책이 집에 쌓여 있는데 또 샀어? 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들리는 소리로부터 조금 덜 미안할 수 있으니까.



    내게서 책을 구매하거나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의 사유의 즐거움을 같이 느끼는 듯했다. 책을 가져가고 나서 며칠 후 문자나 쪽지로 연락이 왔다. 책 한 권을 가져간 후, 또 다른 책을 구매하러 온 사람도 있었고, "책 많이 모으셨네요, 저도 정리해야 하는데..." 라며 세 권을 사가신 분도 있었다. 이건 아마도, 만인이 공통으로 가진 고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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