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You've got a friend in me
서울에 비가 억수로 내리던 날, 같은 동아리였던 동생과 언니를 1년 만에 만났다.
우리는 대학생 때 부산 경남 지역 연합 광고 동아리에서 처음 이름을 익혔다. 동아리는 같았지만 기수가 달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어쩌다 같은 조가 되거나 뒤풀이 술자리, 혹은 선배와의 인사에서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나눈 인연이었다. 그래서 '만났다'라는 표현보다는 '이름을 익혔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지 모른다. 이후 만나게 된 건, 시간이 한참 흐르고 나서 막내인 지원이가 2년 차, 내가 3년 차가 넘어설 때 우연하게 '우리 한번 만나요!'라는 것에 동의해 만나게 되었다. 첫 만남 전의 우리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모두 다른 누군가에 의해 건너 듣거나, SNS를 통해 서로의 일상과 취향을 슬쩍 엿본 것이 전부. 어쩌다 만나게 되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간접적로나마 접한 정보들에서 서로 비슷한, 알고 싶은 결의 조각을 발견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랬을까. 분명 사회에 나온 후 처음 만났음에도 함께 나누는 이야기의 주제는 빠르게 서로의 속내까지 흘러갈 수 있었다. 처음 맛보는 우롱 하이와 두릅 튀김이 신기하고 맛있었던 이자카야 강남 에독코에서 한참을 떠들고 마시면서 지난 시간들을 이야기했다. 마케터와 기획자의 일, 그리고 스타트업의 동향. 동기간 활동하진 않았지만 그 시절 동아리에서 있었던 이야기, 요즘 하는 생각과 고민들까지. 보통 친하지 않은 관계에서 대화는 가볍고 뭔가 제대로 끝맺음 못한 채 찝찝한 안녕을 고하기 마련이다. 잠시 뒤면 기억하지 못할, 겉을 핥다가 참 맛을 못 보고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린 첫 만남에서부터 시간이 언제 가는지 모를 만큼 재밌고 빠른 호흡으로 대화를 이어갔던 것이 생각난다. 그때 대화에 빠져들다 남자 친구에게 3시간 동안 연락하지 못해 걱정하면서 전화 온 것이 기억날 정도니까.
그리고 이번의 두 번째 만남. 작년에도 만난 후 곧 다시 보자~하고 헤어졌지만 한국인의 '조만간 보자'가 실현되기는 쉽지 않다. 그러다 동생의 결혼 소식으로 마침내 성사된 1년 만의 만남! 작년의 이자카야 에독코를 우리의 아지트라 칭하며 다시 만나게 된 것. 첫 만남 장소에서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 2번째 만남이라니,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아마 3번째 만남도 그곳이 되지 않을까? 이런 낭만 가득한, 재미있는 연결고리를 만들 줄 아는 사람과 함께라는 것이 행복했다. 그리고 세찬 비가 내리던 그날에도 빈틈없는 대화로 저녁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런 경험을 돌아보면, 인연이 만들어지는 건 함께 보낸 시간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엉덩이가 가벼운 탓에 회사도 여러 곳을 거쳤고, 학부 시절에도 여러 집단에 소속되며 보냈기에 '아는 사람'의 울타리는 매우 넓은 편이다. 그럼에도 그 울타리 안의 내 마음의 문이 열리기까지는 다소 장벽이 있는데, 겨우내 친해진 친구는 겉보기보다 내가 가까워지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했다. 본인도 그 문을 여느라 꽤나 애 먹었다고, 나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지만 아무나 집에 초대하지는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였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진득하게 인연을 이어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럴까, 한 때는 내 조각을 억지로 접어가며, 내키지 않는 마음에도 시간을 내어 자주 만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좀처럼 가까워지지 못한 마음이지만 아직도 기회는 있을 수 있으니까!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지금은 함께 보내는 시간의 양보다 질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굳이 힘들이거나 나를 꾸미지 않아도 자연스레 맞는 조각이 있고, 그런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훨씬 풍족하고 만족도 높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이제는 긴장하거나 조급하지 않게 되었다. 자주 못 봐도 괜찮다. 서로의 삶에 충실하다가 어쩌다 시간이 허락할 때 만나 나누는 맛있는 음식과 솔직한 이야기들이면 충분하다. 정말로, 시간보다 중요한 건 그날의 온도, 습도, 조명이었다.
*잠시 생각해봤던, 내가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사람의 특징
1. 경청하는 사람인가
2. 서로의 생각에 대한 질문을 나눌 수 있는가
3. 내가 응원할 수 있는 사람인가
> 이게 생각보다 3번이 쉽고 1번이 어렵다.
나이 드는 건 이런 면에서는 좋다. 예전에는 사람을 만날 때 살짝 긴장하고, 만나면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할까? 어떤 주제를 이어가지? 라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그 마음에도 여유가 생겼다. 별 다른 계획이나 의도가 필요치 않다. 그냥 가서 잘 듣고, 그 사람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반응하고, 너라면 그저 잘 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과 응원만을 보내기로. 친구라는 존재는 그런 거니까.
� 오늘의 글, 음악
When the road looks rough ahead
가는 길이 험난해 보이고
And you're miles and miles
따뜻한 잠자리로 부터
From your nice warm bed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때,
You just remember what your old pal said
너의 그저 오랜 친구가 해 주었던 말만 기억해
Boy, you've got a friend in me
너에겐 나라는 친구가 있어
...
토이스토리의 OST였던 You've got a friend in me. 애니메이션과 별개로 이 노래를 무척 좋아해요. you're my friend(너는 내 친구야)가 아니라, You've got a friend in me(너에겐 나라는 친구가 있어)라는 표현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친구라는 존재는 나에게 특별한 무언가 해주지 않아도, 그냥 '있다'라는 그 자체만으로 행복과 응원이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이 영상 속의 Claire와 아빠. 너무 사랑스러운 우정으로 느껴지지 않나요? 음악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좋은 인연이 있다면, 이번 주 저녁에 밥 한번 먹자고 연락해보는 건 어떨까요, 여러분의 주변에 좋은 인연이 늘 가득하기를 기원할게요.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 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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