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답을 할 수 없는 질문
초중고 시절에는 친구들과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을 왜 그리 자주 했을까? 누구는 부모님부터 줄곧 이 지역에 살고 있다 말을 하기도 하고 할머니집은 저 멀리 어디라고 설명을 하기도 했다.
어릴 적 고향이 어딘지 답하는 것이 참 어려웠다. 항상 음.. 을 섞어 한두 번 쉬어가며 어렸을 때 살았던 경상도 지역이름을 말하기도 하고 설명을 보태 외갓집이 어딘지 구구절절 말해보기도 했다.
엄마의 고향은 경기도 평택시로 엄마가 태어난 그곳에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서 줄곧 사셨지만 이젠 모두 돌아가시고 외삼촌 한 분이 그곳에 남아계신다. 아빠의 고향은 황해도 어딘가이다. 아빠의 기억에도 없고 나는 당연히 뵌 적 없는 할아버지는 갑자기 사라지셨고 (아마도 당에 잡혀갔을거라고) 할머니와 함께 형과 3살 때 북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하셨다. 아빠는 3살에 기억이 있을 리 만무한데 일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고향은 위쪽 지역으로 생각하시는 듯했다. 몇 년 전엔 남편에게 노트북을 들이밀며 구글맵으로 위치를 찾아봐 줄 수 있냐고 물어보신 적도 있었다.
나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나 아주 조금 살았고 경북 하양시와 영천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강하게 쓰는 유년시절을 보냈다. 언/니야 오/빠야 뭐/하노 어릴 적 아주 찰지게 사투리를 네이티브 억양으로 구사하여서 사투리를 안 쓰시는 엄마 아빠 눈에는 그 모습이 참 신기했다고 여러번 말하신 것 같다. 초등학교1학년이 되어 대전으로 전학을 오면서 학교를 다녔다. 오빠와 내가 모두 학교를 졸업하였고 나는 대전을 떠났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대전은 고향이 아니었다.
그곳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없어졌다. 15년 이상을 살았지만 대전은 친척도 없고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경기도로 이사하신 이후로는 결혼하고 찾아가는 친정집도 내게는 낯선 동네였다.
"왜 친정집에 자주 안 가?
다른 집 와이프들은 애기 어릴 때 친정에 가서 1주일씩 2주일씩 지내다 온다던데."
"여기가(남편과 사는 집) 더 편해."
부모님께 부탁하거나 의지하기보다 혼자서 일을 해결하는 경향이 강한 나의 성향도 한몫했지만 이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배경이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부모님의 형제자매 일가친척들 모두 경기도와 서울에 있으니 자연스러운 거주지의 이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초중고 시절의 추억을 느낄 틈이 사라졌다. 대전..하면 살던곳-고등학교다닌곳-대학다닌곳-놀러다닌곳, 서구 중구 동구 유성구 대덕구 곳곳의 과거 모습들이 눈에 훤한데(?) 더 이상 대전에 갈 일이 없다. 마지막으로 다녀온 건 아주 오래전 친구의 결혼식이었다.
돌아갈 어릴 적 동네가 없다는 것은 어쩌면 과거를 잘 회고하지 않는 나의 성격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나나 우리 가족 뿐 아니라 대체로 한 곳에 오래도록 머무르며 살지 않는다. 그럴 땐 어디를 고향이라 할 수 있을까? 우리 아이들의 고향은 서울이 될까 ?
어린 시절 16년을 살았던 대전 다음으로 그리운 곳을 골라보자면 오랜 일터였던 가산동과 신혼집이 있었던 신도림이다. 고향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6년 만에 신도림에 가보았다. 놀랍게도 타임머신을 타고 간 듯 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아파트 상가의 가게가 몇 개 바뀌긴 했는데 파리바게트 문구점 편의점 떡집 거래했던 부동산과 철물점까지도 그대로였다.
이사오기 전에 살던 도림천역 앞 오피스텔 쉐르빌도 여전하고 첫 집이었던 동아아파트도 여전했다. 그때도 유치원 자녀와 초중등자녀를 둔 세대가 거주하기 좋은 아파트였던 동아아파트는 지금도 놀이터마다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로 가득했다. 아이들과 놀이터에 함께 나온 젊은 엄마아빠들로 앉을 벤치가 부족한 것도 그대로였다.
고향이 어딘진 여전히 모르겠다. 대전에서 보낸 시간과 서울에 올라와 일하며 보낸 시간이 이제 비슷해져 간다. 서울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곳이라면 아마도 꽤 오래 가산동과 신도림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이 없이 거리의 풍경과 동네만 그리워한다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다. 그리워할 동네에 그리운 사람이 함께 있어야 고향이 성립되는 것일까?
남편의 뿌리는 대구와 아버님이 나고 자라신 영천, 대구경북지역에 뻗어 있다. 남편이 나이 들면 언젠간 대구에 가서 살겠다는 마음도 그래서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어머님이 계시고 동생이 있고 자신도 유년기와 학령기를 보낸 곳, 지금은 아버님 산소와 선산이 있는 그곳.
드라마 파친코에서 선자역의 윤여정 배우가 했던 대사가 생각났다. 선자는 결혼과 함께 오사카로 떠났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재일동포로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다. 선자는 비슷한 재일동포 할머니를 만나고 집에 돌아와 회상에 젖어있다 밤늦은 시간 아들을 찾아가 고향에 가고 싶다 말한다.
"돌아가고 싶다켔다.
한번 더 우리나라 보고 싶다고"
"너희 큰엄마 유골 내 여다 묻기 싫다.
고향으로 모실란다.
고향에 가고 싶다. 내도"
드라마 파친코의 다른 재일동포 할머니는 고향이 그립다 말했다. 모두 다 바뀌었을 지라도 기억에 남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더라도 고국의 흙을 밟고 익숙한 듯이 서있고 싶다 말한다. 다른 나라에 있으면 내 나라 영토가 그립고, 다른 지역에 있으면 그 지역마저도 그리워지는 것이 사람인 걸까?
오래 전 호적등본, 지금의 주민등록초본을 출력하면 보이는 본적지의 주소는 서울이었다. 회사에 입사할 때 본적지 주소를 적어서 제출한 기억도 난다. 왜 회사에서 사원의 본적 주소지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내가 서울로 온 된 것도 어쩌면 선자가 그런 것처럼 뿌리내릴 곳에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고향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내가 깊게 탄탄하게 뿌리내릴 터전을 만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