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워너비들
혼자 살기로 한 후 제일 먼저 내가 정착할 곳에 대해 고민했다. 난 광역시에 붙어있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맥도날드는 있지만 이마트는 없고 cgv는 생길 예정이다. 이 곳에 난 뿌려졌고 심어졌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서울로 옮겨 심어졌다.
서울은 내가 막연하게 꿈꾸던 도시였다. 그런데 그 도시에서 살아보니 서울도 별거 없구나 싶었다. 뮤지컬, 연극, 전시회 등 다양한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화생활은 책과 영화인지라 서울의 장점이 드러나지 않았고 막상 서울에 사니 하는 거라곤 좁은 집에 갇혀 간간히 친구들과 예쁜 카페나 맛집에 길게 줄 서 있는 것뿐이었다. 지하철 한 번 타면 기운이 쏙 빠졌고 사람 많은 거리를 걸을 땐 어깨를 접어야 했다. 야망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서울의 진가를 아는 건 서울을 벗어난 후다. 다시 내 고향으로 돌아오니 서울이 그리워졌다. 지방엔 없는 푸팟퐁커리도 먹고 싶고 지킬 앤 하이드 뮤지컬도 한 번쯤 보고 싶고 무엇보다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 공항과의 거리가 애매해 골머리 앓기 싫었다. 비혼러에게 솔깃할 강연과 북토크는 대부분 평일 저녁 서울에서 진행했다. 배우고 싶은 분야의 소모임도 지방에서는 찾기 힘들다. 심지어 외국인이 환장한다는 예쁜 궁과 높은 빌딩의 조화도 그리웠다. 야망이 생기니 서울이 간절했다.
따듯한 시골의 삶이냐 차가운 도시의 삶이냐. 뜨거운 라떼냐 아이스 아메리카노냐와 같은 갈림길 앞에서 불현듯 내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떠올랐다. 이름하야 나의 워너비들.
ANNE시리즈가 노년까지 진행된다는데 난 아직 16살의 앤밖에 알지 못한다. 앤은 로망 덩어리였다. 시골 한적한 마을에 위치한 초록지붕 집과 앤의 작은 방이 부러웠다. 방에 난 조그마한 창문을 열면 너른 마당과 높은 나무,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오겠지. 오븐에 시트를 구워 직접 케잌을 만들고 차를 우리고 친구와 다과를 즐기며 이야기를 하면 얼마나 즐거울까. 앤이 입은 단조로운 원피스마저 사랑스러웠다. 앤은 그 원피스를 싫어했지만. 현실보다 낭만을 좇는 앤은 나와 거리가 멀어 그렇게 부러웠나보다. 어렸을 땐 그저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으로만 알고 있던 앤을 다 커서 책으로 만나니 그녀의 모든 것이 내 워너비가 되었다. 미니 오븐을 찾다 포기했지만 언젠가 내 집을 갖게 되면 오븐은 꼭 사야지 다짐했을 만큼.
비포 시리즈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건 비포선셋이다. 보통은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달달한 내용의 비포 선라이즈를 꼽던데 난 비포선셋은 음원으로 추출해서 듣고 다녔을 만큼 이 영화를 좋아한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보다 영화 속 셀린가 좋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배경이 프랑스다. 낭만의 도시 아니던가. 프랑스에서 만난 셀린은 비엔나에서 만난 셀린보다 매력적이었다. 프랑스에서 만난 셀린은 몇 년의 세월 속에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분명히 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올바르고 뚜렷한 주관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갖게 해 준 나의 또 다른 워너비였다.
미스 슬로운은 자신의 목표를 위해 거침없이 돌진하는 캐릭터다. 모든 상황에 철저하게 대비해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굴리는 슬로운을 보며 '캬 한 번 사는 인생 저렇게 멋지게 살아야지!' 하고 야망을 불태웠다. 자신의 분야에서 탑이 되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 누구보다 미국이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성공의 최전방에 서 있는 그녀는 저 정도의 위치에 서기까지 수많은 노력을 했을것이다. 그 무엇보다 많은 시련에도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내 워너비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처음 봤을 때가 생생하다. 중학교 3학년 도덕 시간이었는데 선생님께서 '너희들의 야망을 불태워주마!' 하고 틀어주셨었다. 보는 내내 눈이 돌아갔다. 그녀는 우리에게 커리어우먼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지금 보면 읭 스러운 부분이 많긴 하지만 당시 꿈 많던 중학생에게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멋지게 차려입은 그녀는 뉴욕과 잘 어울렸다. 자신의 진정한 꿈인 기자를 좇는 것까지 완벽했다. 워라밸이 엉망이 된 앤디 삭스는 워너비에서 멀어졌지만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사는 앤디 삭스는 영원한 내 워너비일 것이다.
빨간 머리 앤을 보면 시골에서 유유자적 즐거운 일만 하며 살고 싶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아파트 가격이 비싸지 않다. 근처에 푸른 공원이 있으니 안전을 위해 아파트로 타협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정착해 내 로망을 실현하며 살 수 있다. 한 곳에 뿌리내려 그 마을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16살의 앤처럼 나도 이 곳에 뿌리내려 이 마을을 발전시킬 수 있지 않을까.
셀린을 보면 이 작은 마을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로 가면 공동체보다는 나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될테니까. 정 많고 따듯한 이 곳을 지켜내는 것도 보람찬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슬로운을 보면 서울에 가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차가운 도시 여자. 참 웃기고 오글거리기까지 하지만 원래 로망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니겠는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비혼 여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서울에서 선택지가 더 많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비혼이라고 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곳이니까.
결정적으로 날 고민에 빠뜨리는 건 앤디다. 바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녀를 보면 다양하고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며 성장하고 싶어진다. 평온과 안정에 안주해 도태되는 것은 아닐까 고민에 빠진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것은 피로하지만 뿌듯한 일이다. 난 아직도 더 크고 싶다.
비혼에게 정착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누군들 아니겠냐만은 비혼은 정착을 빨리 하면 할수록 인생계획은 편하게 세울 수 있다. 결혼이나 육아 같은 굵직한 이벤트가 없기 때문에 인생그래프를 오롯이 내 뜻대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얼른 정착하고 싶다.
지방이냐 서울이냐.
지방에 정착하면 적은 자본금으로 정착이 가능해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하지만 집값 상승처럼 자본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고 문화, 교육, 교류 등 선택지가 줄어 단조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서울은 정착을 위해 많은 자본금이 필요하다. 정착이 매우 늦어질 수 있으며 현금 흐름을 만드는 자본 축적 또한 마찬가지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하지만 집값 상승과 같은 자본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지방 대비 많고 문화, 교육, 교류 등 선택지가 많아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내가 그린 인생 그래프 시점 안에 결정을 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하게 된다면 적게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고자 한다.
빨간 머리 앤이냐 앤디 삭스냐.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