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전에 번아웃이란 무언가를 열심히 하다가 그 열정이 모든 걸 불태워버려 아무것도 남지않은 공허하고 우울한 감정을 뜻한다.
일을 하다보면 주기적으로 번아웃이 온다. 아무것도 하기싫고 손 하나 까닥하기 싫은 무기력함이 몸을 지배한다. 우울감은 덤이다. 번아웃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쉬는거라고들 한다.
그런데 말입니다.
절약에도 번아웃이 올까?
이 글은 절약에 번아웃이 찾아온 이 땅의 수많은 짠순이들을 위한 글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절약에도 번아웃이 온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아껴야하지? 한푼 두푼 아껴서 뭘 하려고? 오늘 행복한게 중요한거 아니야? 내 동년배들 다 욜로하며 잘만 살던데 난 왜 이렇게 아득바득 힘들게 사는걸까?
실제로 내가 했던 생각들이다.
나는 절약에 도가 튼 사람이다. 욕심은 많지만 욕심을 내려놓는 방법을 그간 몸소 체득했다. 옷을 한포대 버려봤기에 잘 사지 않는다. 음식도 집에서 해먹고 배달음식은 잘 시켜먹지 않는다. 사람들은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카트에 주워담는다는데 나는 정말 사야하는 재료만 사서 돌아온다. 그렇다보니 한달 생활비가 50안쪽으로 끝난다. 대부분은 돈이 남아서 따로 저축을 해둔다.
퍽퍽하게 보이지만 나는 이런 생활에 만족하며 살고있다. 옷은 내 몸이 편한걸로 잘 입고다니고(tpo에 맞춰 근사한 곳을 갈때 입을 옷들도 따로 챙겨두었다.) 배달음식을 시켜먹고 나면 나오는 무수한 쓰레기가 싫어 집에서 예쁘게 차려놓고 먹는걸 더 좋아한다. 외식하면 3~4만원 깨지는 음식도 집에서 차려내면 1~2만원에 양껏 먹을 수 있다. 마트에서도 필요한 것만 사오니 이것저것 담았다가 유통기한에 쫓겨 메뉴를 고르지 않을 수 있어 좋다. 이런 만족스러운 생활에 생활비도 절약할 수 있다니. 만족 만족 대만족!
그런데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는거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아껴야하지? 한푼 두푼 아껴서 뭘 하려고? 오늘 행복한게 중요한거 아니야? 내 동년배들 다 욜로하며 잘만 살던데 난 왜 이렇게 아득바득 힘들게 사는걸까?
이런 번아웃을 위해 장치를 하나 마련해두었다. 그리고 그 장치를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나의 장치는 바로 "대부분 돈이 남아서 따로 저축을 해둔다" 이다.
나는 매달 생활비를 50만원에 책정하고 있다. 당연히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니 상황에 따라 더 늘려도 된다. 이 생활비 안에는 각종 공과금과 보험료, 통신비라는 고정비와 식비, 간식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월세가 아닌 전세를 살고있고 아파트가 아닌 빌라여서 공과금이 적게 나온다. 또, 회사와 집이 가까워 걸어다닐 수 있으며 근처에 본가도 있어 김치와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받아먹고있다. (이 세개가 한식의 주 재료인데다 의외로 비싼재료들이라 이것만으로도 많이 아껴진다.) 이렇게 좋은 조건 아래에서 가능한 생활비 50만원은 종종 다 쓰지 못하고 남게 된다. 이 때 나는 따로 이 돈을 따로 저축한다.
이 돈은 오롯이 나를 위해 쓴다. 모이면 꽤 큰 돈이라 갖고싶었던 물건, 듣고싶던 강의를 산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푼다. 덤으로 얻은 돈처럼 느껴져서 이 돈을 쓸 때는 배포있게 턱턱 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위해 쓸 때보다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에게 쓸 때 더 행복하다. (나의 행복을 위해 쓰는거니 오롯이 나를 위해 쓰는게 맞다.) 친구 생일 선물을 고를 때 만원 이만원을 흥정하지 않으며 가족에게 밥을 쏠 때 메뉴의 가격을 보며 속상해하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훨씬 행복한 사람이 된다.
이 장치 덕분에 절약에 있어서만큼은 올해 단 한번도 번아웃이 오지않았다.
절약에도 번아웃이 온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게 절약해야한다. 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돈을 따로이 마련하는건 아주 좋은 방법이다. 주위에 아무도 남지 않은, 돈만 잔뜩 움켜쥔 할머니가 되고 싶지는 않을테니까.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몸도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