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Jul 17. 2023

지금 이 모습으로 너를 만나지 않아 다행이야

<유열의 음악앨범>


 얼마 전 <유열의 음악앨범>이라는 영화를 봤다. 배경이 90년대부터 이어지는데 엄마가 남겨준 빵집을 여자 주인공인 미수는 친언니 같은 은자 언니와 함께 운영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빵집에 오게 된 남자 주인공 현우가 함께 일하게 되면서 서로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현우의 옛 친구들이 빵집에 찾아오고 은자에게 가불을 받아서 나가버린 현우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후 빵집은 문을 닫았지만 미수와 현우는 미수 제과점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고 미수의 집에서 현우와 함께 밤을 지새운다. 두 사람이 재회한 바로 다음 날 군입대를 한다는 현우에게 미수는 몰래 그의 메일 주소를 만들어준다. 그런데 쪽지에 만들어 준 이메일만 적고 비밀번호는 적어주지 않아서 현우가 군대에 있는 동안 그는 미수의 편지를 하나도 읽지 못하지만 미수는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가 비밀번호를 알아내 주길 바라며 그에게 계속 편지를 쓴다. 그녀의 학번이었던 비밀번호를 그가 기억해내어 풀어내게 되고 그들은 설레는 마음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잡는다. 둘이 만나기로 한 저녁 현우는 일하던 곳에서 시비에 얽히게 되고 그 과정에서 휴대폰이 부서져 버려 그녀의 연락을 받을 수도 할 수도 없는 상황이 된다. 미수는 둘이 연락하기로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 집에 돌아와 그에게 이메일을 적어 보낸다.


-

무슨 일이 있었나 보구나 그런데 연락 없는 네가 오히려 고맙다

난 지금 아주 많이 후진 상태야 너와 오랜만에 만나 웃고 떠들 상태가 못된다는 거지 내가 싫어

누가 날 보는 것도 슬프다 모두 내가 한 선택인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근래 가장 좋았던 일은 딱 하나

현우 네가 비밀번호를 풀어줬다는 거 간만에 크게 웃었다

현우야 좋은 일 생기면 다시 연락하자 나도 좋은 일 생기면 연락할게

-


미수는 그리워했던 현우와 연락이 되어 너무 설레고 기뻤지만 지금 이 모습으로 너를 만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고 말한다. 미수의 양가적인 감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어릴 적에 어른이 되어 반짝거릴 나의 모습을 흔히 상상한다. 그렇게 성인이 된 몇 년 후, 나만의 멋진 삶을 상상하며 살았는데 내가 너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위축되어있을 때, 그 어릴 적 꿈을 함께 공유했던 이가 다시 나타날 때의 반가움과 같이 떠오르는 비틀어진 것 같은 나의 삶도 떠오르게 된다. 그가 너무 보고 싶지만 이런 모습의 ‘나’와 만나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라는 그 마음. 그동안 직면하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숙이고 현실에 타협하고 살아가는 나에 대한 환멸이 느껴졌다. 그렇게 꾹꾹 눌러 담았던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 이메일을 그에게 전달하고 우는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보았다. 닥쳐진 현실에 움츠린 채 버티고 살다 한순간에 무너지는 감정을 오롯이 받아들일 때 그 절망감이 느껴졌다. 영화를 보며 이 부분이 가장 가슴에 남았다. 한 구석에 묵혀두어 곰팡이 쓴 감정이 피어올랐다. 또다시 울컥, 했다.


 내가 미처 표현하지 못하는 감정이나 사고 또는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계를 영화를 통해 가슴 깊이 전달받았을 때 오는 희열과 감동이 있다. 어떤 영화를 보고 평점을 주고 장면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감독의 세계관까지 파악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시절 나에게 맞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 책을 보는 것 까지도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잠식된 것은 아닐까. 그렇게 나의 시선의 초점이 흐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묻는다. 그렇게 너를 잃지 말라고 꾸짖듯이.

작가의 이전글 우주는 실험해볼 수 없다 단지 관측만 할 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