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염색을 하고 월요일에 출근했다. 오랜만에 하는 염색이라 찰랑거리는 갈색 머리에 살짝 기분이 좋았다.
“숸생님! 머뤼! 머뤼!”
한국말이 서툰 바딤이 보디랭귀지로 나의 헤어스타일이 달라졌다고 알아봐 주었다.
“응, 바딤 선생님 머리가 달라졌지? 어때? 예뻐?”
“응응.”
엎드려 절 받기였지만 그래도 바딤이 대답하기 좋게 적절한 질문을 던져주었다고 생각하면서 혼자 뿌듯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왔다. 밝은 갈색빛으로 변한 나의 긴 머리를 알아보고는 모두 환하게 웃어준다.
“선생님, 염색했어요?”
“응. 흰머리 때문에 염색했어.”
“이상하다. 선생님 흰머리 없었는데.”
“아니야. 속에 많이 숨어 있었어.”
“아닌데.”
아이들은 ‘흰머리’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새치 염색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선생님의 태도에 놀랐는지 자꾸 현실을 부정했다. 아이들의 속도 모른 채 청개구리 선생님은 자꾸 흰머리가 엄청 많이 있었다고 우기고 또 우겼다.
“저도 염색해 봤어요.”
갑자기 각자의 염색 경험으로 주제가 넘어갔다.
“저는 다섯 살 때 해봤어요.”
한 어린이가 질 수 없다는 듯이 무리수를 둔다.
“저는 세 살 때 해봤어요.”
눈이 동그래진 선생님의 모습에 아이들은 경쟁을 시작했다.
“저는 한 살 때 해봤어요.”
한 살이라니 웃음이 피식 나왔다. 여기는 지금 분위기가 뜨거운 경매장이다.
“아 그랬구나.”
“그런데 우리 엄마는 염색이 어린이에게는 해롭다고 했어요.”
갑자기 반대 의견이 나왔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스무 살 전까지는 안 할 거예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네. 저는 100살까지 염색을 절대 안 할 거예요."
아까 염색 배틀(?)에 참전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또 다른 전투에 참여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대화들 속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1학년 교실에서는 매일 이런 식의 대화들이 오간다. 과연 어디까지 믿어주어야 할까 고민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대꾸해 본 적도 있다. 저 몹쓸 허언증(?)을 고쳐줘야겠다는 비장한 사명의식이 불탔던 날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말한 학생도 머쓱, 나도 머쓱해지기만 했다.
영혼 없는 경매장에서는 영혼 없이 망치를 두드려주는 사람도 필요한 법이다. 다들 경매가를 던지는 시장에서 나의 경매가를 한 번 던져보는 경험, 그 용기도 훌륭하다. 그것을 기특해하는 마음, 1학년 선생님에게 필요한 마음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선생님 흰머리 엄청 비싸요.”
“흰머리가 왜 비싸요?”
“그거 시간도 엄청 걸리고 몇 번을 반복해야 한대요."
우리 반 똘똘이가 어디서 탈색 과정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친구는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미용실 원장님이 가르쳐 줬어요. 흰머리는 돈도 많이 든 데요.”
“아, 맞아요. 탈색이라고 그런 게 있어요.”
“선생님 흰머리는 엄청 비싼 거예요."
“네?”
“그러니까 앞으로는 흰머리를 숨기지 마세요.”
“아. 네.”
흰머리의 가치를 새롭게 알려 준 똘똘한 꼬마에게 오늘도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