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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죽이 부채



1교시 후 쉬는 시간. 교내 메신저 톡 방에 난리가 났다.


“부채 만들기 사전 지도 꼭 필요합니다! 오늘 지도하실 분은 다음 내용 꼭 숙지하세요!”

“맞아요! 저희 반도 난리 났어요! 아직 안 하신 분들 정신 똑바로 차리셔야 합니다!”

“앞반에서 많이 망가져 부채 여유분이 없을지도 몰라요. 꼭 수량 확보하세요.”


5교시에 부채 만들기(정확히 말하면 꾸미기)를 계획하고 있던 나에게는 유용한 정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부채 만들기 활동에서 큰 어려움을 겪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구실에서 2반 선생님을 만났다. 대혼란 수업 속에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신 표정이었다.


“영미쌤! 부채 만들기 장난 아니에요! 정신 줄 꽉 잡아요!”

“왜요? 그렇게 심각해요?”

“아무래도 애들이 합죽선을 처음 만져본 것 같아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이들은 얇은 대나무 살들이 겹쳐졌다 펼쳐졌다 하는 이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옆으로 열어야 할 부채를 앞으로 열다가 연결이 다 망가지고, 반대로 비틀어 열다가 찢어지고 했던 것이었다.


다행히 옆으로 잘 펼쳐서 성공한 학생들도 있다. 그런데 그다음 관문은 부채 색칠하기였다. 부챗살에 손 옆 날을 대고 힘을 주어 색칠하다가 부챗살을 부수기도 하고, 사인펜 채색으로 부채의 종이 부분을 뚫는 학생도 있다. 부채를 거꾸로 놓고 색연필로 색칠하는 방법을 추천받았다. 그다음으로 1반 부장님이 들어오셨다.


“아휴. 너무 힘드네요. 저는 이렇게 지도했어요. 모은 부채의 옆 날에 본인 이름을 쓰고 그다음에 부챗살을 옆으로 펼치라고 했어요. 앞뒤로 펼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옆으로! 옆으로!”


1반 부장님이 부챗살을 본인의 미간 사이에 두고 그 부채를 바라보며 사팔뜨기(?)가 되셨다. 그 상태에서 옆으로 부채를 몇 번이나 열고 닫으셨다.


“와! 부장님 진짜 좋은 방법이에요!”

우리는 사팔눈의 부장님을 칭찬했다. 부장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맹구가 되어주셨다.(여름인데 ‘하늘에서 눈이 내려와요’)


아쉽게도 부채 여유분이 많지 않아서 우리 반은 그냥 부채를 펼쳐서 나눠 주기로 결정했다.


“얘들아, 이 부채는 ‘합죽선’이라고 하는 부채란다.”

“그게 뭐예요?”

“대나무 살들이 합쳐진 부채라는 뜻이야. 이렇게 접었다 펼 수 있어. 펼쳐진 부채에 예쁘게 그림을 다 그리고 나오면 선생님이 어떻게 접었다 펴는지 한 사람씩 알려줄게. 부채를 거꾸로 대고 색연필로 한번 예쁘게 꾸며보자.”

“네.”


앞반 선생님들의 조언 덕분에 사전 준비와 교육을 철저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려한 대로 실험 정신이 투철한 학생들 덕분에 종이에 구멍이 뚫리고, 부챗살들이 너덜거리기 시작했다.


“얘들아! 얘들아!”

교실 이곳저곳을 누비며 더 이상 부채 사고가 나지 않도록 뛰어다녔다. 두더지 게임처럼 이곳에서 부채 사고가 속출했다. 수습된 부채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부채도 있었다. 5교시 종료 종이 울렸다. 미안하지만 아이들을 몰아내듯 하교 지도를 했다. 미련을 못 버린 몇 명의 아이들이 교실에 남았다.


“얘들아, 오늘 고생했어. 오늘 부채 만들기 힘들었지?”

“네. 그래도 합죽이 부채 만드는 거 재미있었어요.”

“합죽이 부채?”

“네.”

“왜 합죽이 부채야? 합죽선이라니까.”

“선생님이 아까 자꾸 ‘합죽이가 됩시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합죽이 부채에요.”

“아닌데. 선생님은 조용히 하라고만 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선생님 ‘합죽이가 됩시다’ 백 번도 더 했어요,”


아. 그랬구나. 할 말을 잃었다. 나는 ‘얘들아, 얘들아!’라고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수업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계속 ‘합죽이가 됩시다’를 내뿜었던 것이었다.


합죽선이 합죽이 부채로 바뀌다니. 하하하. (머쓱해서 더 크게 웃음.)


앞으로 우리 반 아이들이 여름 부채를 만날 때마다 피, 땀, 눈물을 흘리던 나의 모습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합죽이 부채야! 올여름 잘 부탁한다!

(허공에 날린 ‘합죽이가 됩시다 합!’은 제발 잊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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