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대인관계에 손을 놓고 있었다. 동해에 온 지 3년이 되었고, 그간 쌓았던 관계들과 서서히 멀어졌다. 가끔 서울에 가면 손에 꼽히게 친한 친구들만 만났고, 적당히 친했던 지인들, 친구들과는 카톡으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언젠가부터는 그마저도 소원해졌다. 아마 내가 SNS를 안 하는 탓도 있겠지.
이번에 만난 친구들과도 거진 4-5년 만에 보는 셈이었다. 대학생 때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이었는데, 한 친구가 내년에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와서 그간 못 나눈 이야기를 나눌 겸 만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성수기의 마침표를 찍고, 비수기의 시작을 알리는 신고식이기도 했다.
#간만의 외출이 가져오는 피로
그간 산골에서만 시간을 보낸 탓에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지,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나면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하는 건지, 요즘 친구들은 어떤 주제로 대화를 하는지 고민스러웠다. 한 친구가 자랑이 많은데, 듣다가 속이 뒤집히면 어쩌나, 할 얘기가 없어 어색하면 어쩌나, 나만 모르는 얘기로 대화해서 소외감을 느끼면 어쩌나,쓸데없는 걱정으로 머리가 아팠다.
떠나는 날 아침까지도 마음이 심란해서 서울행 기차 안에서다짐했다. (무려 다짐을..) 어떤 대화를 하던, 기록을 해보자고. 기록하면 어떤 대화든 경험이 되고, 배움이 될 테니 대화에서 인상 깊은 이야기를 기록해 보자고, 내가 그 대화에서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꼈는지 잘 관찰해 보자고말이다.최근 읽은 '거인의 노트'에 나온 기록법이었다.
#레벨업
나 포함 네 명이서 만났는데, 한 언니는 결혼한 지 일 년 남짓 된 유부녀였고, 소식을 전해 온 친구는 내년 9월에 결혼을 한다고 했다. 헌데, 오늘 만나고 보니 남은 한 친구마저 내년 4월에 결혼을 한단다.
저런, 나 빼고 다들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가는구먼.
#나의 변화
전에는 이런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조급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저 '내 나이가 그럴 나이지'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드디어 수용의 단계에 다다른 것인가 싶어 반가웠다.결혼 소식을 자주 들어서 무뎌진 건지,다시 돌아오는 친구들이 하나 둘 생겨나서 생각이 달라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덤덤해진 내 모습이 신기했다.
#쌓여가는 이론
친구들과 어떤 주제로 이야기하게 되려나 염려했는데, 역시나 주된 화제는 '결혼'이었다. 나의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듣다 보니 그 자체로도 흥미로웠다. 웨딩드레스 투어할 때는 사진을 못 찍게 해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 유명 샵은 예약이 어려워서 무조건 해당 샵에서 예약한다는 전제로 피팅예약을 잡아준다는 점, 쓰리피스 예복은 배가 나와 보인다는 점, 신부화장해 주는 곳은 많지만 혼주 화장해 주는 곳은 많지 않아서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는 점, 양측 부모님 한복은 주로 대여해서 입는다는 점 등등등... 몹시 다채로운 결혼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전에는 내 관심사가 아니면 지루해하며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기록을 하겠다고 마음먹어서 그런 건지 경청하게 되었고, 무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삶의 생김새
우리들의 모습은 제각기 너무나도 달랐다. 디자인 브랜드를 운영하는 친구, 광고회사를 다니는 친구, 앱 디자이너 친구, 그리고 산골에서 펜션을 하는 나. 내 삶의 모양새가주변 친구들의 것과 다르다는 걸 자주, 반복적으로 느껴서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이제는 '다름'을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듯했다. 드디어 나는 내 삶을 받아들인 모양이다. 전에는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여' 등등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생각들과 투쟁해야 했다면, 이제는 생각이 간결해졌다.
'그래, 원래 삶의 생김새는 다다르지'
그 이상으로 다른 생각이 파생되지 않았다. 좋았다.
#상상과 현실은 다르다
친구들을 만나는 데에 걱정이 많이 된 건, 안 만나는 동안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엿본 친구들의 삶이 너무 멋져 보인 탓일지도 모르겠다. 해외에서 전시를 하고, 결혼을 하고, 여행하는 행복한 모습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했나 보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난 친구들은 평범했다. 적당히 행복해 보였고,나름의 고민들도 있었다.
사실 나는 내 못난 열등감과 시기심을 마주할까 봐 두려웠다. 내가 친구의 행복을 축하하지 못하고, 불행을 반기는 사람일까 봐, 그런 내 모습을 마주하게 될까 봐무서웠다. 정말이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감정이었다. 만나기 전까지는 그런 감정이 올라올 거라고 거의 확신하고 걱정했는데, 의외였다. 예상했던 불편한 감정들은 올라오지 않았고, 반가움이 가득했다.어쩌면 애틋함까지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했던 스무 살의 기억들이 나를 그 나잇대로 데려가는 것만 같았고, 풋풋한 시절을 회상하며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기도 했다.
#반전의 엔딩
한껏 물오른 대화를 놓치기 아쉬워 시간을 끌었다. 기차시간이 다가오는데 엉덩이는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매진된 KTX 열차표를 연신 새로고침해봤지만 취소표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결국엔 기차역까지 달려갔다. 전혀 예상치 못한 내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