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4 방아쇠는 '봄날의 햇살'이었어
“아가씨 올해 이동수가 많은데, 내 생각엔 회사일 것 같은데?”
“회사요? 저는 퇴사할 생각 없는데요?”
“근데 퇴사하고 싶지?”
“... 그건 누구나.”
“만약에 생각이 있다면 여름이 오기 전에 옮기는 게 좋을 거야.”
“에이...”
“에이? 여기 이렇게 써 있는 걸?”
“저 막 회사 퇴사하고 그런 성격이 못 돼요.”
“그럼 계속 다니는 것도 방법이지. 말리지는 않겠어. 그런데 내가 다년간 이 일을 하면서 말이야. 아가씨는 결국 퇴사하게 될 거야. 아무리 선비 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6월이 지나면 폭발하게 될 거야. 못 참을 거거든.”
“못 참는다는 게... 무슨...”
“이직하려면 올해 괜찮아. 그러니까 만약에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구.”
고백하자면 올해 나는 사주는 3번 타로는 10번도 넘게 봤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생전 관심도 없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원래는 사주광인 친구를 따라 연애운을 점쳐 보겠다고 들어간 연남동의 어느 카페에서 사주를 봐주신 선생님(이제는 그분을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다)은 내게 연애보다는 자기는 “일”고민이 더 크지 않겠느냐는 첫마디를 대뜸 던졌다. 그 이후에 다른 곳에서 봤던 사주에서도 내가 먼저 무슨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다들 나보고 회사를 나오라고, 그런 말만 들어왔다.
꼭 계속 있어야겠어? 혹시 환경을 바꾸거나 부서를 바꿔보는 건 어때?
그때 나는 사주나 타로 전문가, 친구들의 조언에 코웃음을 쳤다. 누구나 다 피로감과 괴로움을 지닌 채 회사를 다니는 거 아닌가? 한편으로 또래의 주변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회사를 오래 다닌 편에 속했기에 나름의 자부심도 있었다. 총 경력 7년. 네 번째 회사. 입사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회사를 내 손으로 먼저 그만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빌런 같은 담당자나 선배와 동료가 회전문처럼 들고 난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다달이 빠져나가는 생활비와 적금을 바라보며 꾸욱 참았다. 내게 초능력 같은 능력이 있다면 남들보다 고통을 참는 능력이나 인내심이 발달된 편이라는 거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좋은 게 좋다고. 내 인생을 뒤흔들 만큼 크게 별로인 일이 아니라면 웬만하면 넘어가자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2020년 입사. 그리고 5년 차 직장인. 처음엔 그런 마음으로 달력에 빗금을 그어가며 경력이 채워지기만을 기다렸는데 3년 차가 넘어간 순간부터는 일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부사수님들을 만나며 내가 아는 지식이나 노하우를 전달하며 일의 효율성을 높이는 쪽으로 이끌어가는 것도 즐거웠다. 고백하자면 일은 정말 재밌었다. 일은 나와 적성에 맞았다. 재밌었다. 좋았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독서모임 커뮤니티 중 <커리어 중간 정산>이라는 클럽을 신청한 적이 있다. 회사에 대한 고민이 컸을 때였다. 일은 재미가 있고, 일 욕심은 점점 커져 가는데 다년간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쉬이 아물지 않은 채 내 마음속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의 장점이자 초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참을성 있는 성격이 결국 나를 병들어가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클럽에서 네 권의 책을 읽는 동안 다양한 분야와 연차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나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람들은 말했다. 그건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이직을 통해 환경을 바꿔보는 건 어떻겠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직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 욕심이 있고, 새로운 환경을 마주하는 걸 즐기지만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두 번째는 다른 조직에 가 봐야 인간군상이야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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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에는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네 번째 회사를 거쳐 오며 나는 그 운이 조금 없었던 편이라고 생각했다. 억울하고, 못된 일을 당하면서 이직 앞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퇴사와 관련하여 타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 같지만 나는 어느 정도는 나에게도 부족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좋게 만들거나 그렇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게 부족한 점이 있었다면 아마도 불의한 일에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돌려서 말할 수 있는 일에 다소 감정적이고 직설적으로 문제를 바로잡으려 외쳤던 게 아닐까 싶다.
퇴사를 결정하게 된 건 의외의 순간이었다. 작년부터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회사 외적으로 활동하는 일들이 잦았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트레바리’라는 커뮤니티에서 모임 진행을 담당하는 파트너(진행자)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에는 소설가로 등단을 하기도 전이었고, 그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재밌고 신기해 지속해왔는데, 어쩌다 보니 현재는 3개의 클럽을 운영하게 되었다.
트레바리에서 사람들에게 보였던 모습은 어쩌면 친구들에게 보이는 나의 가장 솔직한 성격이자 성정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호기심도 많고, 웃음도 많고, 활발한 편이다. 한 가지 주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드는 걸 좋아하는 편이기도 해서 나와 대화를 나누면 정말 끝도 없이 이야길 나눌 수 있을 거다. 실없는 농담이나 새로운 체험을 좋아해서 재밌는 기회가 있다면 놓치지 않고 잡으려 했다. 회사 밖에서의 나와 회사 안에서의 자아가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다. 회사 내에서 나는 언제나 어두침침하고 말 없고, 혼자서만 다니는 사람이 되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내가 그런 이미지가 되어 있었다. 그걸 원했던 건 아니었는데, 언제나 그 편이 나를 지킬 수 있었던 모양이다.
‘봄날의 햇살상’
트레바리를 하며 재미 요소로 받았던 ‘봄날의 햇살상’이 어쩌면 퇴사의 방아쇠였는지도 모르겠다. 회사 밖의 나는 이렇게 활발하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데, 회사 안에서의 나는 병든 닭처럼 걸음을 내딛을수록 마음이 무너져갔다. 게다가 자꾸만 화가 났다. 어른스럽지 못한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화를 내지도 못하고 자꾸만 참아야 하는 순간들이 쌓이고 쌓여 폭발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사실은 죄를 지은 사람이 더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 세상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동시에 가끔은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세상은 변함없이 그 사실을 묻으려고만 한다. 뉴스에서 마주하는 일들이 더 이상 먼 나라 이웃나라 같은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철학서를 뒤적이고, 문학을 통해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 눈물이 났다. 퇴사를 결정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몇 년 동안 흘린 눈물을 화성에 배달한다면 화성이 지구가 될 수도 있을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방아쇠는 갑자기 당겨진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고리 안에 손을 걸어놓은 채 언제든 누군가 내 어깨를 밀쳐 실수로 당겨버리는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말을 뱉던 날에 어머니 같은 CD님 앞에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퇴사를 선택해버렸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억울했다. 억울했다.
불이 꺼진 회의실, 텅 빈 방에서 마지막 면담을 나눈 후 홀로 남아 곡을 하듯 펑펑, 엉엉 울어 주변 사람들이 동물원 밖 관람객처럼 유리창 너머 모여들었다.
해도 되는 것일까. 하지만 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그때 퇴사를 ‘해야만’하는 상황이었다.
마음이 너무 슬펐다. 그렇지만 퇴사와 퇴사 사이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든 나는 그것을 결정해야만 했다. 그 말을 뱉기까지 이성이 수없이 갈퀴처럼 엉켜 있었음을 일러두고 싶다. 여전히 회사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고했던 순간처럼 마음의 절반 이상이 좋지 못하다. 퇴사가 처음은 아니건만 이번 퇴사는 어쩐지 후유증이 오래갈 듯하다. 그러나 사건은 벌어졌고, ‘퇴사’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순간부터 내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다시는 회사라는 조직에 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실은 퇴사를 결정하고 다른 회사를 알아보기보다 아예 업종 전환을 고려했다. 대단한 비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더 큰 욕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람인’이나 ‘잡코리아’가 아닌 ‘알바천국’에 접속했다. 마트나 할인점의 캐셔 일을 알아보았고, 체육관의 안내데스크 업무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 일이 쉬워 보여서가 아니라, 사람들로 받은 상처로 인해 순화해서 말하자면 나는 정말로 떠나고 싶었다. 어느 날엔 내가 힘들다는 표현을 회사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해결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든 날도 있었음을 이제 와 고백하고 싶다. 최대한 회사라는 조직에서 멀어지고 싶었고, 다시는 회사 생활을 못할 정도로 나는 크게 상처를 받은 데다 많이 지쳐 있었다.
전재산 1억. 아마도 회사를 계속 다녔다면 내년쯤 평생대출이라도 받아 집을 마련하려고 했을 것이다. 원래 계획은 그랬으니까. 그러나 이제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내 집 마련보단 내 마음의 짐을 더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던 것 같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성적인 판단도 중요하지만 내게 결핍되고 부족한 건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었던 것 같다. 살아오며 지금까지 큰 변수 없이 성장해 왔다. 원하던 해에 원하는 학교를 들어갈 수 있었고, 졸업 전에 대학문화상 수상과 동시에 취업을 하게 되었으며, 여태껏 크게 쉬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엔 조금 긴 휴식기를 가져 보려 한다. 세계를 돌아보는 건 어떨까. 세상을 유영해 보는 건 어떨까.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닌 내 마음을 돌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100일간의 퇴사일주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에게는 우스울 수도 있는 이 이야기가, 내게는 간절한 여정이 될 것임을 헤아려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