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런던(D+8)
런던에서의 투어는 넷째 날에 신청해 두었다. 런던의 주요 스팟을 구경하는 루트였는데, 왕궁부터 브릿지, 그리고 유명 마켓을 들리는 일정이었다. 그야말로 하루 안에 런던을 둘러보는 투어. 금액도 꽤 되었거니와 이미 한 번 취소된 투어였기 때문에 그날 투어가 갑작스레 취소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전날 늦은 오후, 가이드의 컨디션 난조를 이유로 투어사로부터 예약 취소 통보를 받았다. 그 순간 힘이 쭉 빠졌다.
아침부터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지치지 말고 온 힘을 다해서 둘러봐야지,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아침 일찍 보내야 하는 원고를 메일링하고 분주하게 준비해 여덟 시가 되자마자 숙소 문을 벌컥 열고 나왔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아쉬운 대로 킹스크로스역. 비록 해리포터 스튜디오는 가지 못했지만 해리포터가 촬영되었던 주요 장소는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킹스크로스역에 도착했을 땐 마음이 잔뜩 들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로 영화 속 그 장면에 오다니. 거짓말 같지 않은가. 무엇보다 플랫폼이 여러군데였던 런던의 주요 역들을 보며 나는 종종 해리포터의 한 장면을 떠올리곤 했다.
일찍 가서인지 미리 설치된 웨이팅라인에 비해 기다리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정말로 킹스크로스 역의 한 곳에는 해리포터가 호그와트행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달려들었던 역사의 한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 사진 값은 무려 15 파운드(한화로 약 20,000원)이었다. 목도리를 걸친 채 지팡이를 잡고 사진 한 장 찰칵. 바로 뒤에는 모녀가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내 뒤에서 나처럼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는 딸에게 혹시 내 차례에 사진을 찍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고, 그다음엔 그녀가 잠깐 화장을 고치는 사이, 그녀의 어머니가 대신 카메라를 손에 쥐었다. 재밌었던 건 내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았을 때 아주머니는 주변을 둘러보며 스트랩을 꼭 손에 쥐었는데 그걸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매치기가 무섭긴 무섭구나 싶었다.
마음에 드는 사진 여러 장을 품에 안고 본격적인 쇼핑 시작. 여행하며 필요했던 물품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목도리나 장갑, 머리끈 같은 것들 말이다. 실은 여행을 오기 전에 가져올까 말까 고민했던 물품들이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살림을 늘려가는 거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며 해냈던 합리화.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리뷰 오브 북샵. 전날 가고 싶었는데 루트를 잘못 짜 놓친 경로이기도 했다. 11시에 예정되어 있는 근위병 교대식을 앞두고 급하게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리뷰 오브 북샵에서도 에코백을 사고, 한국문학을 찾았다. 문학계의 거장들이 다수 등장했던 영국답게 서점이 많았고,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을 취급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시아계 문학이 많이 보였을뿐더러 한국문학이 많이 보여진 걸 보면 말이다.
서둘러 움직여 도착한 다음 일정은 근위병 교대식이었고, 멋스러운 퍼포먼스를 본 뒤 숙소 근처에서 피자를 주문해 배부르게 먹고는 온종일 보고 싶었던 것만을 눈에 담았던 것 같다. 인터넷이나 SNS에 노출되는 거창하고 유명한 관광지들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소박한 것들을 구경하며 돌아다녔던 것 같다. 그런 날들이 꽤 마음에 들었고, 그렇게 평범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이 꽤 좋았던 것 같다.
동시에 여행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뀐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때의 나는 인생과 여행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인생은 삶으로의 여정이라고. 절반은 맞고, 또 절반은 틀린 표현 같다. 매일매일이 특별한 하루보단 소박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는 하루하루가 때로는 더 값지다는 걸 이제는 알겠다. 여행지에 와서 괜히 시간과 돈을 아까워하며 서두르는 것보다는 다음을 기약하며 당장의 내가 좋아하고, 그 지역의 실제적인 문화와 정서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멋질 때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날은 네시가 조금 넘어 집에 들어와 간단히 요리를 해 먹고 다시 부엌에서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리고는 일찍 이부자리에 누워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읽었다. 잔잔한 배경음악을 틀며 책을 읽고 있는데, 웬걸 아홉 시 즈음 들어온 룸메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뭔가 싶어 물어보니 집 앞까지 이상한 사람이 따라왔다고 한다. 이 빌라에 사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자꾸만 자기가 이 집에 산다며 들어왔다고.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그 숙소는 그다음 날에도 휠체어를 탄 남성이 자신이 이 숙소에 산다며 문을 열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밤늦은 시각, 매니저가 새롭게 체크인하는 손님을 픽업하다 실랑이를 벌이자 갑자기 휠체어에서 일어나기도 했다고.
브뤼셀에서 이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사장님은 어쩌면 최근 들어 동양인이 자주 그 빌라에서 보이니 장소가 발각되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브뤼셀에서 나는 몇 번이나 인종차별을 당했고, 파리와 런던에서도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목격하며 (심지어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조금 충격을 받았다. 한편 그날 밤 룸메이트도 나와 비슷한 코스를 돌았던 모양이다. 그녀는 두 손 가득 해리포터 영화에 등장했던 개구리 모양 초콜릿을 소중한 듯 품에 안더니 조심스레 포장지를 열었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들어 있던 마법사 카드를 보고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고 크리스마스의 풍경 같아서 나는 괜히 웃음이 나왔다. 나보다 어린 사람이 어린 마음으로 귀여운 모습을 보고 예뻐하는 것을 보니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는가 아닐까 싶었다.